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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3) (욘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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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3) (욘 1:4-16)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나는 요, 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가서, 외쳐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니느웨와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가기 위하여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마침 배를 만나 배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잠을 자기 위하여 배의 밑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아는 사람이 그랬습니다.
     
이제, 요나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요나가 탄 배에 있던 선장을 비롯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엉뚱하게 벼락 맞은 사람인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때문에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시셨습니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4).

이제, 말씀 속에서 위기를 만난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자 합니다. 해피데이 626을 앞두고 예비신자의 마음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려고 합니다. 마음을 아는 것이 전도의 첫걸음입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 사람들에게 우선 어떤 마음이 들게 됩니까?

I. 불안

5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 5a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사공들은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자 두려워하였습니다. 두려운 마음에서 그들이 하였던 일은 배 안에 있는 짐을 바다에 내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기술적으로 배를 가볍게 하여 배가 뒤집히는 것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였던 또 하나는 종교적으로 저마다 자신들의 신들에게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본성적으로 자기들의 신을 향하여 부르짖기 시작하였습니다.

1.그들은 자기의 신들에게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신에게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면 자기의 신을 찾습니다.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시내산 위로 기도하러 올라가서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 32:1)며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10년 전, 미국이 911 테러를 당하였을 때, 교회마다 예배드리는 사람이 늘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만 예배드리는 사람이 많아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충격이 있으면 모든 종교에 기도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신을 찾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들에게만 부르짖습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선장은 잠을 자고 있던 요나까지 깨워서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선장이 요나가 믿는 하나님을 알았을 리 만무합니다. 누구나 신을 믿고 있을 터이니 너도 기도하여 우리가 덕을 좀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신앙의 단계는 아닙니다. 막연히 도움을 간구하는 단계입니다.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그의 신에게도 도와주기를 기원하였습니다.


2. 그들은 남의 신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자신의 신에게 도움을 청하다가 안 되면 다른 사람의 신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데 “석가모니와 알라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왜 그렇게 기도하느냐고 물었더니 “석가모니가 안 되면 알라라도, 알라가 안 되면 예수님이라도. 누구 하나에게는 걸릴 것이 아니냐?”고 하더랍니다. 인격적으로 신앙의 대상자를 만나고 섬기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혹시 해로운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에서 보험을 드는 것처럼 종교를 가지는 것입니다. 맨 정신으로는 살 수 없어서 술을 마신다는 사람처럼 무엇인가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어 종교적으로 여기 저기 기웃거립니다.

요즘 사람들은 섬기는 신을 대신하여 축구나 야구와 같은 스포츠에 몰입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기 스타들에게 열광합니다. 우리나라 어느 연예인이 군에 입대하는 자리에 일본의 아줌마들이 모여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깊은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신앙을 몹시 배척하는 사람에게 영적 공허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종교적인 사람을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5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5b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는 진즉에 배 밑창으로 내려가 누워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요나는 육체적으로 지쳤을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안도감이 들었었을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피하여 깊이 숨어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배 밑창에 내려가 누워 깊이 잠들었습니다. 이런 그를 향하여 선장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6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6a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선장은 그를 ‘자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하셨던 것처럼 선장도 역시 그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선장은 요나가 요나의 신에게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기 위하여 잠을 깨우며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세상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신을 부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남의 신에게라도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기에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진정으로 믿어야 할 분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이 요나의 탓이었던 것처럼 이 세상이 이렇게 혼돈스러운 것은 우리가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나만 잘 되면 된다는 달콤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안일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당장 문제가 없으면 된다는 근시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세상에서 깨어있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각각 자신의 신을 부르고 남의 신이라도 이용하려는 종교심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II. 공포

풍랑을 만나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했지만 기도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 다음 단계로 나갑니다.

7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7a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서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내리는지 알아봅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제비뽑는 것은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미래를 점치기 위해서 제비뽑았습니다. 숨겨진 원인을 알기위해서 제비뽑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일어났는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인지 알아서 어찌하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누구의 탓으로 정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 그들은 정죄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때 함께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제자들의 생각에는 누군가의 죄 때문에 이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잘못으로 장애가 된 것이 아니라면, 부모의 잘못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요 9:1-3). 예수님은 모든 것이 죄 때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재앙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를 정죄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정죄함으로 자신은 자비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리적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절 말씀입니다.
: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요나가 제비를 뽑자 사람들은 요나를 추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비를 뽑은 요나에게 ‘누구 때문에 이 재앙이 임하였는가 말하라.’고 합니다. 누구 때문이긴 요나 가 제비 뽑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누구 때문에 생긴 일인지를 말하라고 하는 것은 요나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책임을 인정하고 확실하게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확실히 지우는 것입니다.

2. 그들은 전가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이유와 원인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유를 찾고 원인을 규명하는 노력들은 인간 생활에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원인을 찾는 것이 정죄를 위한 것이라면 그 결과는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잘못한 일 중에 하나는 ‘마녀 사냥’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힘없는 누군가를 마녀로 지목하고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웠습니다. 종교적 인간의 윤리는 누군가를 정죄하고 그의 탓으로 돌리려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가지는 정죄와 전가의 모습입니다. 모든 종교가 율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가져야 할 신앙인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9절 말씀과 1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a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우리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도망친 비겁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 나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우리는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정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는 말을 생활에서 실천하여야 합니다.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II, 1712- 1786, 프로이센)이 어느 날 감옥을 방문했습니다. 대왕을 본 죄수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신들의 무죄를 하소연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죄수만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대왕은 그에게 어째서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배가 너무 고파서 칼로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돈을 빼앗았다고 잘못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때, 대왕은 명령했습니다. “여봐라! 저 고약한 죄인을 즉시 석방하도록 하여라. 모두 죄가 없다는데 이 사람만이 죄인이라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갇혀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죄로 물들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저자를 즉시 석방하도록 하라.”

우리는 모두 죄가 없다는 세상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잘났다는 세상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백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신의 신들에게 부르짖고 다른 사람의 신에게도 도움을 청하는 종교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정죄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윤리로도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 희망이 있습니까?


III. 경외

사람들은 종교나 윤리를 넘어서 신앙의 실재를 만나게 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고 요나가 말하자, 사람들은 겁에 질려서 어찌하여 그런 일을 했느냐며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풍랑 때문에 이미 두려워하였습니다. 요나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자 이번에는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바다에 파도가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나자 그들은 요나에게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우리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지겠소?”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절망의 다른 표현입니다.

1. 그들은 절망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이 신에게 빌어도 보고, 저 신에게 정성을 들여도 보았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서 절망합니다.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다른 사람 탓으로 책임을 떠넘겨도 속이 시원하지 않는 답답함에 절망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짓 종교생활과 적당한 윤리생활로 만족하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절망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깨달은 사람이자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요나와 함께 있던 뱃사람들은 매우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노를 저어 물결을 헤치고 육지로 되돌아가려고 애써보았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그들은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것은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는 죄를 묻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그들은 포기합니다.

사람들은 노력하고 애씁니다. 무엇인지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이야말로 인생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절망은 신앙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이, 윤리적인 사람들이 절망하고 포기할 때, 먼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을 섬겨야 합니까?
 
12절 말씀입니다.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사람들이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였을 때, 요나는 자신을 들어서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몸을 그들의 손에 맡겼습니다. 요나는 기꺼이 책임을 졌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말로 표현하면 사랑이며 섬김입니다.

3. 우리는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글자그대로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져서는 안 됩니다. 몸을 죽이는 인신공양은 절대로 금물입니다. 몸을 죽이는 것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면 됩니다. 사랑의 섬김으로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마우 풀러신학교 총장은 ‘무례한 기독교’(IVP)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정통 기독교의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욱 공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전도하기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내면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나는 불순종하여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사람들을 신앙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영혼을 깨우기 위하여 먼저 깨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책임을 전가하려는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절망하고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시기를 십자가를 지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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