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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은 양을 찾아라! (눅 1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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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을 찾아라! (눅 15:1-10)


공항 분실물 센터에 가면 여러 가지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물건이 쌓여 있다고 합니다. 티셔쓰로부터 시작해서 값나가는 모피코트 또 값비싼 귀금속에 이르기까지 많은 물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찾아가는 물품들도 있지만 찾아가지 않는 물품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왜 찾아가지 않을까? 귀찮아서 찾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고 또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기에 찾는 방법을 몰라서 찾지 못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자식입니다. 가끔 공원같은 곳에 가면 미아보호소가 있습니다. 엄마손을 잡고 공원에 왔고 놀이터에 왔다가 이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울고 있는 아이를 미아보호소에 데려다 줘서 거기서 울면서 엄마를 간절히 찾습니다. 부모들도 아이를 찾느라 이리저리 애간장을 태우다가 아이를 찾으면 얼마나 기뻐하는 줄 모릅니다. 자식을 잃어버리고 그 자식 찾기를 포기하는 부모는 아마 세상천지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20년전입니다. 우린 1991년 대구에서 일어났던 개구리소년 5명의 어린이 실종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학교갔다온 아이들이 뒷산에 개구리 잡으러 간다고 갔는데 그 길로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년후에 아이들의 유골이 뒷산에서 발견되어서 일단은 종료가 되었지만 아직도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범인이 누군지 누가 왜 그런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초 20년만에 아이들이란 제목으로 영화가 상영된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관심이 있어서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들 참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일도 놔버리고 농사도 포기해버리고 직장도 나가지 않고 아이 찾는일에 또 아예 체념한 상태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속에서도 볼수가 있었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 이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한자어에 단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자를 보면 끊을 단자에 장을 가르키는 장자를 씁니다. 창자가 끊어진다 단장이라는 말을 씁니다. 아주 애닮은 것을 표현할 때 단장이 끊는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그런말을 씁니다. 

진나라때 환온이라는 장수가 촉나라를 치기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배를 타고 양쯔강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양쯔강에는 삼협이라는 협곡이 있어서 아주 강폭이 좁아지는 곳이 있습니다. 올라가다가 잠시 배가 쉬게 되었는데 한 병사가 잠시 용변을 보러 갔더니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가지고 왔습니다.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배를 타고 올라가는데 어미원숭이가 그걸보고 백여리를 강기슭을 따라서 배를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덕위에 올라가서 배를 향해 뛰어 내렸습니다. 

결국 배에 던져졌는데 가서 보니까 어미원숭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봤더니 창자가 토마토막 다 끊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새끼원숭이를 빼앗기고 나서 어미원숭이가 애간장이 녹는 마음으로 새끼 원숭이를 찾으려고 달려왔는데 이미 장이 토막토막 끊어져 있더라. 그래서 거기에서 단장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들은 환온이라는 장수는 그 새끼원숭이를 풀어주어서 도망가게 했고 새끼 원숭이를 잡아온 병사를 불러다가 아주 심한 매를 때리고 재판을 해서 내어 쫓아 버렸다고 합니다. 한갓 미물인 원숭이도 자식을 잃어버린 어미의 마음이 장이 녹는 것 같은데 하물며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더 나아가서 우리를 찾고 계시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은 애간장이 녹는 것 같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5장은 복음중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가지 비유 세가지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먼저는 잃은 양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목자가 양을 치는데 저녁이 되어서 양들을 우리에 집어넣다가 봅니다. 그런데 한 마리 한 마리 세다가 보니까 한 마리가 빕니다. 아흔아홉마리밖에 안됩니다. 목자는 그 한 마리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아홉마리를 우리에 두고 그 양을 온 산을 뒤지며 찾아다닌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게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잃은 은전의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라고 합니다. 어떤 여인이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선물받은 열드라크마가 있습니다. 은전인데 이것은 한 사람의 노동자 임금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선물받아서 고리에 꿰어서 머리에 메고 남편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늘 몸에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불을켜고 온 집안을 뒤지면서 그 은전하나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집의 구조는 우리처럼 깨끗한 바닥이 아니고 거기에 짚으로 얼기설기 놓여있고 또 잎사귀를 가지고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찾으려면 온집을 들어내야 합니다.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은전을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마지막 잃은 아들 이야기 우리가 탕자의 비유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아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다립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동구밖에 나와서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올까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가지 이야기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잃어버렸든 양을 잃어버렸든 아들을 잃어버렸든 그 상실의 슬픔이 다 있습니다. 여러분도 잃어버린 경험이 있으시죠? 가끔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나면 핸드폰을 두고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돈지갑두고 가시는 분은 못봤습니다. 핸드폰은 가끔 두고 가십니다. 우리들도 핸드폰 잃어버리면 답답합니다. 내가 교회에 두었나 화장실에 두었나 별의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찾기까지 참 불편합니다. 잃어버린 것 찾는 마음이 그런 겁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있었던 교회에서 성지순례를 간적이 있었는데 잘다녀와서 김포공항에 내렸습니다. 가방을 찾는데 수화물취급소에서 장로님 한분의 가방이 없는 것입니다. 보통일이 아닙니다. 장로님의 안색이 싹 변합니다. 가방속에 가족들 줄 선물부터 모든게 다들었는데 가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못찾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오면서 화물비행기가 몇 번 바뀌면서 짐을 옮겨싣고 옮겨싣고 하는데 뭔가 짐표가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직원의 실수인지 짐이 다른나라로 가버린 것입니다. 장로님이 양평까지 가는데 말씀한마디 안하십니다. 섭섭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되겠다 싶어서 한분씩 선물을 거뒀습니다. 쵸코렛도 걷고 뭐도 걷어서 가족들 가져다 드리라고 그냥 갈 수 없잖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한두달 후에 연락이 와서 김포공항에 갔더니 그 물건이 다시 도착을 해서 찾아서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마음이 아픕니다. 더나아가서 사람을 잃어버리면 더한것입니다. 

또 한번은 대전 유성에서 박람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 모시고 간일이 있었습니다. 갔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수천명 수만명은 모인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주의를 줬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약속시간이 되었는데도 한분이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다 나눠가지고 찾는데 결국 못찾았습니다. 몇시간을 찾는데 못찾았습니다. 이젠 어쩔수 없다. 그리고는 돌아왔습니다. 양평으로. 와보니 그 어르신은 이미 양평에 와 계셨습니다. 길을 잃어버리시고선 먼저 버스타고 와 버리신것입니다. 그런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부모가 자식을 잃어버렸을 때 그 마음은 어떠할까. 그건 이루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공원에 갔다가 자식을 잃어버렸다면 부부간에 싸움이 날겁니다. 왜 공원에 오자고 해서 애를 잃어버렸느냐고. 손에 일이 잡힐수가 없습니다. 잃어버렸다는 상실의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공통점은 애타게 찾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열심히 찾습니다. 4절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 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찾는다는 말이 두 번나옵니다. 

이게 뭡니까. 찾을때까지. 포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시한도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 것입니다. 찾아서는 너무기뻐서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동네 사람들을 부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애타게 찾는 점은 똑같습니다. 여인도 애타게 은전하나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밤 늦게까지 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다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이야기의 공통점은 다시 찾음으로써 기쁨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5절 6절입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너무너무 즐거워서 어깨에 메고 와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은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제 위에 누님이 계시는데 순천에 사십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지 어릴 때 그림을 그리는 소질이 있었는데 학교갈 형편도 안되고 그림 지도를 못받으니까 나이가 들어서 애들 다 키우고는 지방에 있는 어떤 대학에 들어가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방과후 교실에 가서 그림교사가 되고 그러는데 예식에 가는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이번에 서양화부분에 전국대회에서 입선을 했다고 좋아합니다. 저도 통화는 못하지만 너무너무 좋아서 누님이 입선되었다니까 문자메시지를 보낸적이 있습니다. 기쁜일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좋은일은 알리고 싶습니다. 동생한테 친척한테 부모한테 다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은양을 찾으니까 너무 좋아서 동네사람들 다 모아서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손익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양한마리 찾은게 대단합니까? 그런데 양한마리가 더 드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건뭐냐? 양을 물질로 보는게 아닙니다. 양을 생명으로 보는 겁니다. 양을 자기 가족으로 보기 때문에 그는 그 찾은 양을 즐거워하는 겁니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가끔 전도축제를 할 때 조금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돈많이 들여서 몇 명전도한다고 그거 안드리는게 낫겠네요. 그건 잘못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분들은 교인 한분늘면 헌금 얼마 느는것 생각하기 때문에 안맞는 겁니다. 한 영혼으로 보십시오.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게 천만원이 아니라 일억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은 겁니다. 

바꿔말하면 여러분 자식이 납치당했습니다. 납치범이 전화해서 돈 얼마주면 돌려보내겠다고 하면 돈 따지겠습니까. 천만원정도면 내가 찾아오지만 삼천만원이면 못찾겠다 니 마음대로 해라 그런부모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들이 지금 수술할 지경인데 돈이 일억이 든다고 포기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할수만 있으면 집을 팔아서라도 자식 살릴려고 할 겁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영혼이 돌아올 때 하늘에서는 빵빠레가 울리고 하나님은 춤을 추시는 겁니다. 20년동안 잃어버린자식이 돌아오면 어느부모가 덩실덩실 춤을 안추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기쁨을 보십시오. 

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한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늘 아버지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들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마음의 백분의 일이라도 읽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냉담하고 계산적이고 손익계산이나 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앞에 그 한영혼이 얼마나 귀한가. 여러분 이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오늘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즐거워하시는 겁니다. 15장 24절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니 그들이 즐거워 하더라.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아끼는 것 없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힙니다. 신발을 새로 신킵니다. 가락지를 끼웁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게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으로다 물질의 가치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왜? 그것은 영혼의 문제이고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가정에 자녀가 하나 있다가 어려운일을 당해서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면 그 부모가 상심에 빠졌다면 그러지말고 고아원에서 애 하나 데려다가 키워요 그러면 됩니까? 그걸로 대치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낳은 아이고 정을 준 아이이기 때문에 고아원에서 데려다가 키운아이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겁니다. 그러기에 목자는 양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양의 생명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또 그 양이 가시덤불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견딜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목자와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목자는 양을 하나의 물질로 여기지 않습니다. 돈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양을 생명으로 자식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안다고 했습니다. 어릴때 저희 집에서도 양을 6, 7마리 키워서 젖을 짜서 배달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형님이 이름을 지어서 불러줬습니다.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수야, 정숙아, 영희야. 이름을 다 불렀습니다. 그처럼 양과 목자와의 관계는 바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소중한 관계입니다. 

또 한가지 있습니다. 양은 제발로 돌아오지를 못합니다. 그렇기에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는 집을 잃어버려서 못들어왔다 그런일은 없습니다. 개는 어디갖다 놔도 집을 다 찾아옵니다. 몇 년전에 신문을 봤더니 서울에 있던 어떤 부인이 개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개를 산 사람이 제주도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몇 달만에 개가 서울로 돌아온 겁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개는 기막히게 냄새를 맡는지 길이 기억에 남는지 돌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제가 개띠인게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왜. 개는 집에 돌아오니까요. 밖에 나가서 집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개에 비하면 양은 어리석습니다. 양은 어리숙하고 바보스럽습니다. 어릴때보면 부부사이도 더우면 좀 떨어져자자 덥다 그러는데 양은 여름에도 다 붙어잡니다. 겨울이면 붙어야 되는데 다 떨어집니다. 이런 바보들이 어디있습니까. 양이 이렇습니다. 거기다가 시력이 안좋아서 멀리를 못봅니다. 그래서 풀뜯다가 낭떠러지인줄도 모르고 풀뜯다가 죽는 양들이 수도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앞에 양이 떨어지면 같이 떨어집니다. 이게 양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도움과 인도가 꼭 필요한게 양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십시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거늘, 어리석은 인간들이 양과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은 더 나아가서 길눈이 어두워서 돌아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입니다. 왜 기억력이 없느냐. 아니면 길치라서 그러는가 아니면 침해인가. 별생각을 다해봅니다. 언젠가 목회자 모임을 갔더니 어떤 목사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와서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기사가 차를 몰고 한참을 가다가 할머니가 택시기사에게 묻더라는 것입니다. 여보게 기사양반 내가 아들집에 가자고 했나 딸네집에 가자고 했나. 택시기사가 뒤를 돌아보면서 그러더랍니다. 아니 할머니 언제타셨어요 그러더랍니다. 둘다 마찬가지입니다. 양은 도무지 자기 집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잃은 양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교회같이 신앙생활 하다가 우리곁을 떠난분들이 있습니다. 예배 나오지 않는 분들, 구역예배 나오지 않는 분들, 자기발로 걸어나오는 일은 극히 없습니다. 가서 모시고 와야 합니다. 다시 설득하고 기도해주고 사랑을 베풀어서 그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상처를 쓰다듬어 줘서 그를 다시 모시고 와야 합니다. 그게 바로 잃은 양 찾기 주일입니다. 

그러면 누가 잃은 양이냐? 어떤분들이 그럽니다. 다른분들이 자기가 잃은 양이라고 하면 기분나빠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하나님안에서 잃은 양입니다. 먼저 잃은 우리 자신이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간동안 나 자신이 정말 하나님앞에 견고히 서 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저 자신이 잃어버린 영혼 많습니다. 나는 분명 주님과 동행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주님은 나하고는 아무상관없는 분입니다. 이게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늘 돌아봐야 합니다. 여기에 앉아 예배드린다고 주님안에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내가 정말 주님안에 있는지 주님과 나와의 영적교제가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여섯 살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시골에 살았는데 어머니가 저를 붙들고 시장에 볼일을 보러 나왔다가 집에 들어가야하는데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 그날이 장날이어서 얼마나 사람들이 많은지 시골 만원버스 보십시오. 대단히 사람이 많습니다. 아프리카같은 곳 보면 시골장날이면 지붕에도 타고갑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올라왔는데 영무야 뭘 사놓고 짐을 놓고 왔다는 겁니다. 얼른갔다 오신다는 겁니다. 불안하지만 얼른 갔다오신다고 하니까 빨리 갔다가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간 어머니가 소식이 없는 것입니다. 부릉하고 버스는 출발했습니다. 나는 이제 끝이구나, 울고 난리가 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가 타긴탔는데 저 앞에서 타서 뒤에까지 올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아서. 제가 그때 어머니를 만났으니 다행이지 제가 미아가 될 뻔 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잃어버림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상수씨 이야기를 했습니다. 강원도 산골 1950년대 상수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생일때 큰아버지가 노랑고무신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상수는 노랑고무신이 얼마나 좋은지 잘때도 껴안고 자는 겁니다. 절대로 신지 않습니다. 더러워질까봐. 그리고 먼지만 뭍으면 열심히 닦습니다. 한번은 개울가에서 노랑고무신을 닦다가 그만 실수로 고무신 하나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 그것을 막 따라가는데 개울을 타고 고무신이 떠낼려 갑니다. 몇시간을 따라가서 나중에는 큰 강으로 고무신이 흘러가는데 찾을수가 없습니다. 정신을 차린 상수는 집에 돌아가려 하니까 너무 멀리와버려서 집이 어딘지 알수가 없는 겁니다. 길을 따라 헤매다가 결국 고아로 성장합니다. 그리고는 몇십년 후에 노인이 됩니다. 

어느날 그는 이산가족찾기 TV프로그램을 보다가 거기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언젠가 노랑고무신 때문에 길을 잃어버려서 고아가됐다고. 그런데 시골에 계신 형님이 그 텔레비전을 보고는 자기 동생인 줄 알고 노랑고무신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래서 연락을 해서 동생을 데리고 갔습니다. 집에 가보니 아들 잃어버린후에 어머니는 애간장을 앓다가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연로하셨고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치매에 걸려셔서 돌아온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시는 겁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 자신도 잃어버림 당할 수 있습니다. 정말 내가 주님께 늘 생명의 관계로 붙어 있는가를 돌아보는 그런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잃은 양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잃은 양이 누구냐 믿다가 실족한 영혼들, 우리 구역 식구들중에 지금은 예배에 나오지 않는 분들, 우리 남신도 여신도 회원중에 언젠가 보이다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잃은 양입니다. 믿다가 실족한 분들, 낙심한 분들, 믿음이 식어버린 분들, 마음에 시험든 분들, 그분들을 다시 가서 사랑으로 모시고 오는 것, 이것이 잃은 양 찾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뭘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은 다 잃은 양입니다. 오늘 불신자들의 마음, 잃은양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작정하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모시고 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잃은 양 찾기 주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찾아 갈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사랑은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누구를 사랑해도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면 뭐합니까. 가서 고백해야 합니다. 프로포즈해야 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세요. 용기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가는 것입니다. 옆집이 굶어죽어가는데 어떡하나 어떡하나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쌀 한포대라도 퍼주면서 사랑을 베풀어야지 않겠습니까. 사랑을 찾아가는 겁니다. 내 시간을 소비해서 내 물질을 희생해서 그를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한 영혼 영혼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분은 그럽니다. 난 온 인류를 사랑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온 인류를 사랑하는 것 어떻게 압니까. 정말 내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은 온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극히 개인적입니다. 가까운 사람,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소설을 보니까 케시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대학졸업후 남자친구를 만나 사귀다가 실연을 당합니다. 그 아픔 때문에 집에 있지 못하고 집을 뛰쳐 나가버립니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리저리 방탕하다가 결국 사창가로 흘러가고 몸파는 여인이 됩니다. 나중에 마약에 손을 대서 마약 중독자가 됩니다. 살 의미가 없습니다. 나이가 35살 되었는데 이제 투신해서 죽으려고 생각하다가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어머니 얼굴 한번 뵙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먼발치에서라도 한번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서 그는 그 밤에 시골 자기 집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집앞에 갔더니 집앞 마당이 환합니다. 대문이 활짝열려 있습니다.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있습니다. 이게 무슨일이 있나 가봤더니 어머니는 그 딸이 집을 나간후에 방에 불을 끄지 않습니다. 혹시 딸이 왔다가 불이 꺼져 있으면 주무시는 어머니 깨울까봐 나 그냥 가야지 그럴까봐 혹 대문이 닫혀있으면 그냥 돌아갈까봐 대문을 열어놓고 딸을 기다렸습니다. 십년동안. 이 딸은 어머니와 극적인 재회를 이루고, 다시금 그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 과거를 잃어버리고 귀한 딸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극히 개인적입니다. 자기딸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결국 온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사랑은 내일로 미룰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달려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아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어디 갔는지 모르는데 여보 우리 웃어라 동해야 본다음에 찾으러 가면 안돼? 그런부모 없습니다. 당장 대신시장이고, 사러가 시장이고 저녁이고 뭐고 다 치우고 애 찾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구역식구들에게 부탁하고 온 교회에 문자메시지 돌려가지고 우리애를 찾아달라고 그럴 것입니다. 나좀 피곤한데 쉬었다가 가면안돼? 우리 내일부터 우리아이들 찾자. 이런 부모는 없습니다. 진짜 부모가 아닙니다. 지금부터, 바로 지금, 찾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오늘 내 옆에 있어야 될 영혼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기도하지 못하는 영혼들 있습니다. 바로 그분들이 우리의 잃은 양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4절에 보니까 이와같이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소자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찾을 수만 있으면 찾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잃은 양 찾기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담겨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서 오늘도 기도와 사랑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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