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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말로 기뻐할 이유 (눅 10: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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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기뻐할 이유 (눅 10:17-20)


만일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로또에 당첨됐다든가 자식이 명문대에 합격했다든가 아니면 수조원대의 계약을 수주해서 신이 나서 예수님께 찾아왔다면 예수님의 답변이 더 충분히 이해될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약간 김은 새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본문의 제자들은 그런 이유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고 예수님이 시키신 일, 예수님이 명하신 일을 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70명의 제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라고 하셔서 가서 했더니 정말로 그런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신이 나서 그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말씀대로 했더니 그대로 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을 하더이다’ 신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칭찬을 하시지는 않더라도 함께 기뻐하실 줄로 기대를 했는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의외의 말씀인 것입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역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교만해질까봐 그런 것도 아니고 그들의 마음속에 바람이 들어갈까 봐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을진대 우리가 기뻐할 이유도 행함의 실적 때문에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기뻐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이 돈을 많이 벌든 자식이 명문대에 합격하든 귀신이 우리에게 항복하든 여기의 공통점은 인간의 행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의 실적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좌우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사랑으로 기뻐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론적으로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건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이렇게 대답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특별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약간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전하기에도 약간 어렵고 듣기에도 약간 어렵기 때문에 약간의 집중이 필요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이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써서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이건 신앙적인 관점에서 쓴 게 아니고 정신건강학의 차원에서 쓴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소유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다보니까 정말로 사는 이유를 모른다는 말을 하고자 한 책입니다. 

돈은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생이 돈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이 먼저이고 돈은 나중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순서를 바꾸어서 사람보다도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보다는 돈에 우선순위를 둡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하여 가족도 희생하고 건강도 희생하고 또 신앙마저도 희생합니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돈을 번다는 보장도 없지만 번다고 해도 그것이 누구에게 유익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목말라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에는 얼마나 보람이 있는가? 나는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찾고자 애를 씁니다. 이건 어른이나 아이나 남자나 여자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결과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 결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서 내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내 존재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이든 돈이든 명성이든 애정이든 그 자체가 귀중하기도 하지만 거기에서 내 시간, 내 정성, 내 존재의 보람,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집착하는 결과는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에서의 성공, 여기에서 뭔가 보람을 얻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자녀의 진학 성공에서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남에게 받는 인정, 칭찬, 애정 여기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목회활동에서 거두는 실적 성장 여기에서 인생의 보람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람마다 종류는 다르지만 자신의 수고의 결과를 통하여 자기가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건 나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한은 율법적인 사람이 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율법적인 사람. 율법이 무엇입니까. 은혜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은혜는 거저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거저 베푸시는 사랑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신 것은 당신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지 우리의 율법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적으로 판단하셨다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불의한 자이고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적으로 우리를 판단하시는 게 아니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 할렐루야! 여기까지는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 이외의 구분에 대해서 우리는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율법적으로 삽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만큼은 은혜라는 것을 알고 의지하는데 그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지극히 율법적인 생각을 하고 삽니다. 남에게도 그렇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가족에 대해서도 그렇고 자녀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지극히 율법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삽니다. 

나에게 제일 혹독한 심판은 내 자신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 출전했을 때 심판들이 점수를 줍니다. 그런데 나에게 제일 짜게 점수를 주는 심판이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나에 대해서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내 자신이에요. 내가 나의 외모에 대해서 제일 부끄럽게 생각한다거나 나의 실력 없는 것에 대해서 제일 창피하게 생각한다든가 나의 도덕적인 부족함에 대해서 제일 죄책감을 느낀다든가 또 나의 사람에게 애정 받는 부분에 대해서 제일 부족하다고 생각하거가 나의 신앙에 대해서 제일 혹독하게 비판하는 존재가 남이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내 자신이에요, 내 자신. 아마도 여성이 화장을 하는 이유도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보다는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한 심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자 분들을 보면 화장을 안했을 때는 얼굴을 가리고 지나다닙니다. 새벽기도회 끝나고 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고 할 때 화장을 안 한 여자 성도님들은 엘리베이터를 안타고 얼굴을 가리고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화장을 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자기가 제일 예쁘게 생각합니다. 그제야 남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생각인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누가 그것을 볼 수가 있고 누구에게 그것을 보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내가 화장 안한, 가리지 않은, 포장하지 않은 나의 모습을 누구에게 보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내 자신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고 하나님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심리에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을 때 하나님이 동산에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수풀 뒤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드리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창피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남에게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고 하나님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보지 않으시는 것이 아닌데. 

그러니까 우리 안에 있는 많은 갈등은 결국은 내 자신에 대하여 내가 냉정하고 냉혹하게 판단하기 때문이요, 결국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지극히 율법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의롭다는 말을 종교적으로 해석해서 그렇지 좀 더 넓게 해석하면 깨끗하다, 정하다, 보기 좋다, 사랑스럽다 또 인정할만하다, 좋다 이런 의미로 판단하면,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또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은 나를 받아들이고 좋아하고 이해하고 또 부끄러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귀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율법이 요구하는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바울은 그들을 할례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없어요. 

할례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파가 많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믿지만 그 이외의 것을 요구하는, 예수님도 믿지만 그래도 사람이 뭔가를 갖춰야 반듯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 그 이외의 또 무엇을 가져야 사람들 앞에 내놓을 만한 그런 삶이 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그 종류가 무엇이냐가 달라지는 것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적은 것은 마찬가지라는 얘기입니다. 은혜를 족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라는 얘기입니다. 어렵다는 얘기에요. 

최근 국내의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큰 뉴스가 됐지요. 그런데 신문을 보니까 죽기 전에 자신의 몸을 서른아홉 번 채찍으로 내리쳤다는 기사가 있었어요. 왜 자기 몸을 서른아홉번이나 채찍으로 때렸느냐. 자신의 욕망을 죄악시해서 자기를 벌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채찍으로 때린다고 해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사함을 얻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부끄럽게 생각해서 자신의 몸을 때려야 된다면 이 세상에는 남아날 존재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함만을 생각하고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극단적인 율법주의라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때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죄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한다고 우리가 죄사함을 얻는 것도 아니고 의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주의적인 사람은 남에게도 엄한 것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엄해요. 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해요. 기뻐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너희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행위의 결과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찾으라 그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걸 기뻐하기 위해서는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됐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죠. 

귀신이 항복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건 좋은 일이고 예수님이 명하신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데에서 자신의 보람을 찾으려고 하다가는 그럼 귀신이 항복하지 않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을 어떻게 하라는 얘기입니까. 귀신이 안 나가는 날은 어떻게 할 겁니까. 그럴때는 낙심하고 자기를 실패자로 여기고 우울하고 불안하게 살 것입니까. 귀신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이지요. 귀신이 안 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불안한 게 문제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 대부분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요. 남에게 뒤질까 불안하고, 이대로 하다가 패배자가 되지 않을까 불안합니다. 목회자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목사가 교회가 부흥함으로 기뻐한다면 그럼 부흥을 안 할 때는 낙심하고 실패자로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고 여기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를 탓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결과를 기쁨의 조건으로 삼는 사람은 결국은 인생의 기복이 심하고 결과에 따라서 일희일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건 믿음의 삶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건 항상 기뻐하는 삶이 아닙니다. 인생에는 맑은 날만 있는 게 아니고 흐린 날도 있고 비오는 날도 있고 어두운 날도 있는데 그런 날에는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다는 얘기입니까. 예수님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예수님 같은 실패자가 없었어요. 따르던 사람들은 다 떠나갔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종교재판에 의해서 죄인으로 규정받아서 범죄자로 처형을 당하는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가 보시는 앞에서 처형당합니다. 가족을 남긴 것도 아니고 재산을 남긴 것도 아니고 젊은 나이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죄인으로 규정 받아서 처형을 당하는 예수님. 그 순간에 예수님을 봤을 때는 예수님 같은 실패자가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도다’라고 선포하시고 운명하셨고 사흘 만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할렐루야!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압니다.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이었는지 과연 이것이 성공적인 것이었는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존재가치는 내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내 행위에 좌우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값은 사는 사람에 좌우돼요. 사는 사람이 내가 백만 불을 줄 테니 팔라고 하면 백만 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이 부여하십니다. ‘너희가 이보다 귀중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귀하지 않은 존재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그건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남도 그렇고 나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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