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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믿는 사람이 사는 법 (롬 1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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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믿는 사람이 사는 법    
 
 2011-05-14 15:27:41       
 
 
 
예쁜 새 한 쌍이 한적한 곳 낮은 나뭇가지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집이 거의 완성되어 갈 때 마차에 볏짚을 가득 싣고 농부가 그 밑을 지나가면서 다 되어 가는 둥우리를 그만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새들은 다시 집을 짓기 시작하여 그날 오후에는 거의 완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황혼 때 농부 한 사람이 지게에 나무를 가득 지고 그 밑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지게위로 뻗은 나뭇가지에 새 둥우리가 걸려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새들은 다음 날 또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낮에 개구쟁이들이 그 밑을 지나다가 매미채로 새집을 무너뜨려 놓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한동안 숲 속이 조용한 틈에 새들은 그곳에 둥우리를 만들고 알을 낳아 새끼를 부화시켰습니다. 귀여운 새끼 네 마리가 예쁜 주둥이를 벌리고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은 평화롭고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이 행복한 새 둥지에 무서운 침입자가 찾아 왔습니다.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숲 속을 지나가다 낮은 곳에 있는 둥우리를 보고 나무에 기어올라 새끼 네 마리를 모두 잡아먹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행복했던 새 가족의 이야기는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몇 차례 둥지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으면 낮은 곳에 둥지를 짓는 것이 위험한 줄 알고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깨닫지 못했기에 엄청난 비극으로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 못하는 새들만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위험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낮은 곳에 생각이 머물고, 삶의 방식이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늘 죄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은 더욱 미련하다 할 것입니다. 높은 곳을 보지 못하여 비극을 자처했던 새 둥지가 불행의 온상인 것처럼 땅에만 매여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앙인의 처세는 심판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앙인이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의 비판대상이 되고 말거리가 되는 것은 신앙인의 사는 법이 올바르지 않은데서 오는 부작용들입니다. 

시시때때로 우리의 신앙의 둥지는 위협을 받습니다. 늘 어지럽히며 흩어놓으려는 무리도 만납니다. 수시로 무너뜨리려는 자도 있습니다. 아예 작정하고 달려드는 침입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신앙의 둥지는 헐리고, 망가지고, 깨어지고, 파산되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없을 지경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여기까지 가서는 안 될 일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일의 결과 앞에는 전조(前兆)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일이 있기까지 미리 일어나는 징조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만한 일들이 있기 전,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에도 반드시 전조가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인격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품이 무너지고, 신앙인격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급기야는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맙니다. 무너진 인간관계 속에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성도들끼리 아옹다옹하는 모습 속에 좋은 신앙의 열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전조(前兆)를 잘 읽지 못하면 신앙이 좌초되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은 악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사에는 반드시 악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 악을 이기고 선에 속하는 일이 관건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종교철학 교수인 [리차드 스윙버]교수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별해서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체로 느끼는 것들입니다. 배가 고프다든가, 몸이 아프다는 것, 흔히 쑤시고 결린다고 말하는 것 등 신체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물리적인 악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정신적인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아픔입니다. 마음이 상심되어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울 정도로 심적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 혹은 실패와 좌절로 인하여 번민하는 마음의 아픔을 악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상태의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심적 상태를 말합니다. 비틀어지고 꼬인 마음상태입니다. 그래야 될 이유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또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상태 때문에 고통을 느낍니다. 증오와 질투와 시기, 이런 것들이 이 상태의 악에 속합니다. 

네 번째는 <도덕적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도덕적 규범에 대한 실패를 말합니다. 도적질을 했다거나 남을 폭행하는 등 드러난 범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문제는 어떤 것이 더 악한가가 아니라 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여기서부터 생각해야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속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그 법의 총체적인 근본정신은 악을 미워하는 것과 선에 속하여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악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법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베풀고 열심히 주를 섬기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입니다. 가만히 보면 뭐니 해도 역시 사랑은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이 있어야 존경도 따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베풀기도 합니다. 또한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유명한 [에릭 프롬]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사랑의 기술>이라고 하는 책에서 사랑의 속성을 다섯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관심이요, 두 번째는 이해며 그리고 세 번째가 존경, 네 번째는 책임지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푸는 것이 인간의 다섯 가지 기본적인 사랑의 속성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사랑의 속성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이 여러 가지 말하는 것을 잘 보면 그 중에 특별히 남보다 먼저 앞서서 해야 할 것을 한 가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존경>입니다. 10절 하반 절에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새겨야합니다. 진정한 사랑의 결과란 자신의 영광이나 자신의 지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꺼이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빌2:3에서 말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과 같습니다. 곧 <존경>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으로 먼저 존경하며 또한 존경 받을 만하게 살아야합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다 잃은 것 같으나 모든 사람으로부터의 존경을 받는 그러한 인격이 있다면 그가 바로 성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가 행복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돈을 잃었다면 부분을 잃은 것입니다. 건강을 잃었다면 현재를 잃은 겁니다. 그러나 존경을 잃었다면 미래를 잃어버린 겁니다. 존경을 잃고 좋은 집에 살면 무엇 합니까? 존경을 잃었는데 좋은 차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존경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을 살자면 얼마나 힘들고 가슴 아픈 일입니까? 존경을 잃고 자녀를 대하고 가정을 대한다면 이 또한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존경이란 <인간의 질적 무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얼마나 가졌느냐하는 소유나, 얼마나 배웠느냐 하는 지식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하는 것을 <양적평가기준>이라 한다면 존경은 <질적인 평가기준>입니다. 

인간은 <질적인 평가기준>에 따라 살아야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존경을 받고, 존경해야하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질적 무게>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남을 마땅히 존경 할 줄 아십니까?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존경 받고 삽니까?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이 여러분을 질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삶의 동기가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가 쫓기는 삶의 유형의 동기가 있습니다. 

일종의 병적 증세입니다. 항상 두려워하며 무언가 무서워하며 삽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무섭습니다. 피해망상에 살고, 우울증에 살고, 고독에 사는 사람, 인격적으로는 벌써 죽은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반가워할 줄 모른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무서운 감옥입니다.

동물원에가면 원숭이란 놈이 있습니다. 원숭이에게 먹이를 줘 본적이 있습니까? 참 이상한 것은 주면 고맙게 받아먹으면 좋겠는데 항상 눈치를 살피다가 순간적으로 탁 잡아챕니다. 

꼭 그렇습니다. 주는 사람은 좋은 마음으로 주려고 하는데 왜 곱게 받지 못하고 확 뺐어가듯이 하는지 말입니다. 거참 이상하다 했더니 어떤 분이 "그것이 동물입니다." 그래요.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주어도 좋게 받지를 못하는 게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가만히 보면 사람답지 못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주고 좀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꼭 빼앗는 마음으로 받고 빼앗기는 기분으로 주고 하니 이게 뭐가 되겠습니까? 주어 놓고도 꼭 강도 만나는 기분이라면 이 사이에 무슨 존경이 있겠습니까?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두려움과 쫓김, 불안과 공포 속에 전혀 존경이 없고 신뢰가 없는 그 관계 속에 사는 것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항상 보상적 관계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게 오는 유익과 손해에 대한 계산이 빠릅니다. 교회를 나가도 존경하는 마음으로 나가는 것은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이 교회를 나가서 내게 무슨 이득이 돌아오겠는가?’ 이것부터 생각하는 삶이라는 것은 피곤한 것입니다. 이익부터 먼저 챙기는 그러한 인격, 그러한 관계성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사람을 고달프게 만듭니다. 기회주의적이고, 실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요. 자기 인격과 소중한 존경을 좀먹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매사에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권면처럼 사람이란 먼저 존경할 때 내가 존경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존경할 때에 내 마음에 평안이 있고, 신뢰가 있고, 자유 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존경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누군가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이 존경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매일 같이 술도 마시고 또 술만 마시면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어지간히 어려운 가운데서도 남편을 잘 돌보고 또 남편을 잘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참 당신도 대단하우. 그런 남편과 어떻게 한 평생을 살아가느냐?”고. 그분 대답이 이래요. “성경에 있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 그래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동의가 되십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남편을 사랑하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사랑은 사랑입니다마는 존경이 없는 사랑, 그것은 불행입니다. 이건 피차 못할 짓이라 이 말입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성도들 간에 다투는 일들이 있습니다. 사이가 좋지 않아요. 세상 같으면 ‘너, 내가 안 보면 그만이다.’하겠지만 그래도 교회이니까 안 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주일 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티를 안내려고 친한 척 해봅니다만 아직도 속에는 ‘교회이고 또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 해서 내가 사랑한다.’는 앙금이 그대로 있습니다. 

아름답게 이루어져야 할 성도의 교제가 원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사랑입니다만 존경이 없는 사랑입니다. 이건 불행한 것입니다. 슬픈 것입니다. 피차에 못할 짓입니다. 

그런데 그 아픔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생각해 보면 상대방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이요, 내가 존경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분명한 신앙의 흔적이 있을지라도 그의 인격에, 성품에 존경이 없으면 바리새교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살인한 것도 아니요, 간음한 것도 아니요, 도적질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멸시하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 것, 나도 모르게 어느 사이에 존경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 이것이 내 성품 속에 있는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여기에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이 있습니다. 참 평안의 길이 있습니다. 마땅히 존경하고 마땅히 존경 받을 만한 삶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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