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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전의 그가 아닙니다 (행 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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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그가 아닙니다 (행 4:13-21)

몇일 전 뉴스에서 <댈러스 윈즈>라는 26세 된 미국 사람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2008년 교회에서 페인트칠 봉사를 하다가 고압선이 얼굴을 스치는 사고를 당해 아예 얼굴이 타서 없어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식물인간이 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이식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뉴스 장면을 잠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동영상) 잘 보셨습니까? 사고 후의 모습에 비하면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에도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주인공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요? 먼저 본문의 상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했고, 예루살렘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예가 베드로의 설교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중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장애인 거지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켰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그로 인해 오천 명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긴장한 것은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백성의 장로들 같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을 방치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불러서 따끔하게 경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제자들을 그 앞에 세웠습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정도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그 제자들이 다니면서 이상한 소리를 해 본들 무슨 큰 일이 있겠나? 제자들이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갈릴리의 시골 출신들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회적으로 볼 때 그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력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엄청난 권력과 재물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시골 출신들, 많이 배우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정도의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기만 해도 주눅이 들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산헤드린 공회는 명실상부한 유대 최고 기관이었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4장 5절 이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평소 같으면 감히 얼굴도 쳐다볼 수 없는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 서면 예수의 제자들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제대로 말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당당했습니다. 그들은 겨우 두 사람이었지만, 유대의 최고 인물 수십 명 앞에서 의연했습니다. 더듬고 떨기는커녕, 기탄없이 이야기했습니다. 

13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이상히 여기며>란 말을 다른 번역본들은 <놀랐다>고 번역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전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게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저는 목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늘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은 <왜 우리 안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변화를 가져오는 종교입니다. 복음은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 지 오래 되었는데도 여전히 완고하고, 여전히 욕심 사납고, 여전히 거칠고,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강적 앞에서 두려워하고, 여전히 비겁하고, 여전히 게으르고, 여전히 과거의 쾌락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에 취해 살 때가 많습니다. 

이런 점은 저 같은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부귀 명예 영광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서약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물론 목사가 된 이후에는 세상에 나가 돈을 벌거나, 명예가 보장되는 자리를 두고 다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욕망을 교묘히 교회 안에서 추구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 명예는 버린 것 같으나, 교회적인 명예를 추구합니다. 세상 영광은 버린 듯하지만, 교회 안에서 영광을 누리려 할 때가 많습니다. 여전히 고집도 세고, 교만합니다. 단지 욕망을 세상에서 추구하느냐, 교회 안에서 추구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질적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의 아픔입니다. 

왜 이런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복음에 문제가 생겼거나, 하나님이 허약해지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당연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을 잘 믿는다면 변화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오래 다니고 있는 것,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맡은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변화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멀었습니다. 부디 우리 안에 거룩한 변화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좋은 방향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나쁜 쪽으로 변화되는 것은 참 변화가 아니고, 변질입니다.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널리 전해진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491년, 새로 지어진 이태리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시에 Santa Maria degle Grazie> 수도원 벽에 벽화를 그릴 화가를 찾던 로마 교황청은 당시 명성이 높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최후의 만찬> 모습을 그려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다빈치는 그 때부터 모델로 쓰일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오랜 엄선 끝에 예수의 모습을 상징할 수 있는 선하게 생긴 찬양대원을 찾았는데, 찬양하는 모습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다빈치는 그를 모델로 작업에 들어갔고, 6년 동안 배신자 유다를 제외하고 모든 제자의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배반자인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다빈치가 유다의 모델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 시장은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들 중에서 모델을 찾아보라고 제안했고, 다빈치는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모습의 한 사형수를 선택해서 유다의 모습을 완성했습니다. 모델이 되었던 죄수가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지던 날, 그가 다빈치에게 말했습니다. <날 모르시겠습니까?> 다빈치는 대답했습니다. <난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소!> 순간 그 죄수는 그림을 가리키며 울부짖었습니다. <저기 저 그림 속에 그려진 6년 전 예수의 모델이 바로 나였소!> 알고 보니 예수님의 모델이 되었던 천사 같던 청년이 술독에 빠져 온갖 나쁜 짓을 하다가 결국 사형수까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성스럽고 깨끗했던 얼굴의 젊은이가 최악의 살인마로 돌변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빈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변질이지 변화가 아닙니다. 성도는 좋은 쪽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못된 습관이 변해야 합니다. 게으르던 사람이 부지런해지고,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합니다. 도박을 끊어야 합니다. 음란을 끊어야 합니다. 편협하던 사람이 너그러워지고, 이기적인 사람이 남을 불쌍히 여기게 되고,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해지고, 성격이 불같이 급하고 거친 말을 내뱉던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젠 부드럽게 말하고, 하고 싶던 말도 속으로 삼키고, 남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비판적으로 어둡게 바라보던 사람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 세계로 밝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절망을 가져오던 사람이 세상을 기쁘게 하고, 밝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방향으로 변화되었을까요? 그들의 변화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람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이 사람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자,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려워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두려운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는 마태복음 10장 28절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 두려운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과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람들 앞에서 의연해졌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최고 권력층의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계시게 되자 그 어떤 권력자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자 그들은 골방문을 열고 광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꼭꼭 숨어 있었으나,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의 광장에 나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들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변화가 일어나자 그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세요. 산헤드린 공회의 높은 사람들이 명령합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건 보통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지체 높은 대제사장들의 말입니다. 감히 거역할 수 없습니다. 과거 같으면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대제사장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할렐루야!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대제사장들의 말을 거부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숨어서 떨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말 앞에 주눅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피하여 숨을 곳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변화는 그들의 마음에 빛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골방에 숨어 문을 잠그고 있던 모습은 마치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이게 죽음의 상태입니다. 이런 제자들은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도했습니다. 이제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그들은 어둠에 숨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밝은 빛 가운데로 옮겨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주눅 들지 않아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 안에서 밝게 살아야 합니다. 빛은 생명이요, 축복입니다. 

어느 백화점 식품 영업부에서 소비자 소비심리 행태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똑 같은 10평 넓이의 쇼윈도 위에, 똑 같은 시금치 100단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A 코너 위에는 100촉짜리 전구 10개를 켜 두고, B 코너 위에는 100촉짜리 전구 6개를 켜 두었습니다. 세 시간 후 판매 실적을 조사했는데, 결과가 어떠하였을까요? 100촉짜리 전구 10개를 켜 놓은 A코너 쪽은 시금치가 90단이 팔렸고, 100촉 전구 6개를 켜 놓은 B코너 쪽 시금치는 70단이 팔렸습니다. 이 간단한 실험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은 밝은 곳으로 몰린다는 것입니다. 밝은 곳의 시금치가 훨씬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차이도 꼭 이와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이기 쉽습니다. 어둡고, 비판적이고, 게으르고, 우울하기 쉽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어둡습니다. 그러나 믿음 있는 사람은 긍정적입니다. 환난을 당하나 찬송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웃음, 여유, 부지런함, 청결, 끼끗함, 자유, 넉넉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있는 사람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밝습니다. 

사람들은 믿음 없는 사람 곁을 하나 둘 떠나갑니다. 그러나 믿음 있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꾸준히 모여듭니다. 그리하여 그 모여 든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합력하여 놀랍고도 위대한 일을 이루어 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화되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2세기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핍박을 받을 때 많은 변증가들이 나타나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풀기위해 변증서를 작성하여 황제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중에서 <하드리안 황제에게 보낸 변증문서>는 기독교인들을 <새로운 인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생각과 삶이 과거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이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이 문서의 일부를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저들도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아기를 갖다 버리지는 않습니다.  저들이 ‘육에 속해’ 사는 것이 사실이지만, ‘육을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저들은 지상에서 무척 바쁘게 활동하면서 지내고 있지만, 저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저들은 모든 법률에 순복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법이 요구하는 그 이상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죄를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생명에 이릅니다. 저들은 가난하나 많은 사람을 부하게 합니다. 저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완전한 풍족을 즐기고 있습니다.  저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나, 저들의 그 수욕 가운데서 영광을 받습니다. 저들은 선을 행하고 행악자로 벌을 받으며, 벌을 받으면서 생명에 이르는 것을 기뻐합니다.> 

당시 성도들은 고린도후서 6장 8절 이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미 작고한 유명 코메디언인 이주일씨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란 프로그램이 생각나십니까? 비록 코메디였지만,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뭔가를 보여드려야 할 때입니다. 속빈 강정 같은 모습, 소리만 요란하고 실속은 없는 모습, 겉과 속이 다른 거짓된 모습, 이기적인 모습.....이런 모습이 가득한 세상에 거룩하게 변화된 성도의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 기쁨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한 할머니의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화면을 보십시오. 할머니 인상이 어떻습니까? 얼마나 인상 좋고 후덕해 보입니까? 늙은 후 이 할머니처럼 활짝 웃으면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사진은 제가 직접 찍었는데요, 어디서 찍은 줄 아십니까? 놀랍게도 이 분은 저주 받은 병이라고 부르는 나병에 걸려 여수 애양원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거기 박물관에 나병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이 죽 붙어 있는데, 그 중 한 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병을 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그 분은 변했습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자신의 삶을 저주하는 모습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할머니의 표정 어디서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살다가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셨을까요? 할머니의 육신은 약했지만, 할머니의 영혼이 변한 것입니다. 그 변화된 영혼으로부터 미소가 풍겨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도 이렇게 아름다워지길 원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제는 세상의 욕망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복음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람, 옛날의 그가 아니야. 예수 믿더니 딴 사람이 됐어...> 이런 말을 들으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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