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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중적인 본성의 고민 (롬 7: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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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인 본성의 고민 (롬 7:15-25)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 이유 중 하나가 이중인격자라는 것입니다. ‘이중인격’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겉과 속이 다른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중인격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마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신앙생활을 진실하게 하려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고민이 커집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 사도의 심각한 고민이 나옵니다. 자기 자신의 이중적인 본성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부분을 다 드러냅니다. 포장하지 않습니다. 잘 하는 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진실해 보이고 훌륭해 보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이런 이중성이 해결될 수 있을까요? 성경지식이 많아지면 이중적인 본성이 해결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을 신앙생활하면서 겪게 됩니다. 

1. 성경지식이 많을수록 고민도 많아진다. 

계속해서 율법의 두 가지 기능을 말씀합니다. 순기능과 역기능입니다. 순기능은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7절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율법은 엑스레이 같습니다. 그냥 보면 잘 모릅니다. 내시경 사진 같습니다. 겉으로는 전혀 모릅니다. 찍어보면 위염인지 위암인지 알려 줍니다. 
율법으로 우리 자신을 찍어보면 죄가 보입니다. 율법을 많이 알수록 죄도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지식이 많을수록 고민도 많아지게 됩니다. 

역기능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 하면 더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만드는 겁니다. 
8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11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와가 죄에게 기회를 내 줍니다. 탐심에 빠집니다. 탐심에 빠져서 선악과를 다시 보았더니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전에는 저거 먹으면 죽는 거야’ 그렇게 보였는데, 죄에게 속아서 보니 너무 좋아 보입니다. 
먹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먹으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먹으면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먹고 아담도 먹게 하였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아담 하와는 죽고 죄는 더 강하게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성경지식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을 알면 알수록 내 속에 죄가 점점 더 잘 보이게 됩니다. 죄책감에 더 빠지게 됩니다. 심판의 두려움에 더 빠지게 됩니다. 성경지식이 많을수록 고민도 더 많아지게 되는 겁니다. 

2. 우리에게는 이중적인 본성이 있다(15-23)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두 가지 본성을 갖게 됩니다. 새 사람의 본성이 생깁니다. 옛 사람의 본성도 뿌리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중적인 본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새로운 본성을 가진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주십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주십니다. 
마귀도 사람에게 생각을 넣어줍니다.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제자인 가룟 유다에게 악한 생각을 하게 한 겁니다. 
이 두 본성은 추구하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롬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이런 이중적인 본성을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15절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새로운 본성을 가진 내가 뭘 원하지 압니다. 문제는 그걸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반대로 새로운 본성을 가진 내가 미워하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옛 본성, 죄의 본성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한 판 했습니다. 새로운 본성을 가진 나는 마음에 안 드는 남편이라도 사랑하는 걸 원합니다. 그러나 행동은 옛 본성을 따릅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행동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17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 죄니라.” 

이중적인 본성 중에 죄의 본성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성을 따르고 나면 시원합니까? 괴롭습니다. 후회합니다. 그런데도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고민입니다. 

두 번째는 선을 원하지만 행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선을 원합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원하기만 할뿐 행할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합니다.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선을 행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행동은 악을 행하고 맙니다. 의지적으로 결단은 하지만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회사에서 내가 잘못한 일을 상사에게 진실하게 말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상사를 만나서는 거짓말을 합니다.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왜 그럴까요? 
21절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중적인 본성 중에 죄의 본성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중인격자라고 비난을 받습니다. 누가 말 안해도 죄책감이 듭니다. 스스로 고민이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본성과 거부하는 본성입니다. 

이 둘이 수시로 서로 충돌을 하는 겁니다. 

22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내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좋아합니다. 새로운 나의 본성입니다. 그러내 내 속에 죄를 좋아하는 옛날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내가 죄의 본성을 좋아해서 그걸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새로운 본성을 가진 속사람은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내 속에 옛 본성, 죄의 본성은 자기 배우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남의 여자, 남의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배우자를 사랑하는 마음 대신, 음란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도 이런 이중적인 본성사이에서 갈등을 하며 신앙생활합니다. 
이걸 영적싸움이라고 합니다. 이 영적전쟁이 지금도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본성은 무엇입니까? 진짜 나의 본성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본성입니다. 죄의 본성은 더 이상 내 본성이 아닙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갈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3. 견딜 수 없는 고민을 해야 한다(24)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의 이중적인 본성 때문에 고민을 합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고민을 합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죽을 만큼 고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만큼 자신의 이중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자신의 이중성에 대해 아파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작은 죄에도 아파하는 겁니다. 

한 때는 “나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장담했었는데, 다시 자신을 살펴보니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울 사도가 회심전의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 후자의 설명이 더 합당하다고 봅니다. 

미국의 부흥운동을 일으킨 유명한 요나단 에드워드의 고백입니다. 

<이 도시에 살게 된 이래로 나는 내 자신의 죄악성과 악독성에 대해 매우 뼈아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주 매우 큰 소리로 울 정도로 상당한 시간 동안 그렇게 할 정도로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회심하기 전보다 훨씬 심각하게 악독성과 내 마음의 악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의 불의를 표시한다면 나는 모든 인류 중에서 가장 악한 자로 지옥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이중성을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변명하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죽을 만큼 고민합니다. 그 고민 때문에 깊은 회개를 합니다.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다윗도 자기 죄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시32:3-4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고민만큼 깊은 회개를 합니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리이다.” 

회개가 깊은 만큼 용서받은 감격도 깊었습니다. 

시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맺는 말 

탈무드에 ‘죄는 손님으로 들어와서 주인노릇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신 우리 속에 죄가 주인노릇 하도록 내 버려두지 마십시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고서도, 죄에게 주인노릇하게 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본성을 발견하십시다. 우리도 견딜 수 없을 만큼 고민에 빠져보십시다. 

우리도 깊은 회개의 자리로 들어가십시다. 거기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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