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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최고의 자녀양육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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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자녀양육 (엡 6:1-4)  
 
  
5월은 가정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어린이 날이 있고 어버이 날이 있어요. 그래서 5월은 돈도 좀 많이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교회 세명의 어린아이들이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부모들의 서약도 잘 들었습니다. 이 아이들 정말 잘 키워야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세례받은 이 아이들 뿐 아니라 우리 교회 모든 부모들이 최고의 자녀양육 비결로 다 무장했으면 좋겠다 이런 소원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자녀들이 다 장성한 다음에, 우리가 다 늙었을 때, 그때 자녀들이 자기 자식들을 데리고 우리앞에 와서 이구동성으로 어머니 아버지, 저희를 이렇게 멋지게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아버지 어머니처럼 그렇게 기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될 때, 결혼하고 아기낳으면 곧바로 엄마 아빠가 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자녀를 정말 잘 양육하는 것인가! 이 전문적인 지식과 방법을 많이 배우지 못하고 곧바로 자녀를 기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외과의사는 대학6년 졸업하고 시험보고 전문의 과정 딴 다음에 인턴하고 그 다음에 레지던트 되어 수십번 실습하고 수술실에서 환자의 몸에 칼을 댑니다. 만약에 의사가 들어와서 수술받는 환자에게, 사실 저는 수술실습 한번도 안해 본 초년병입니다. 그래도 자 시작할께요, 그렇게 말하면 환자가 엄청 불안하고 긴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 되는 것은 결혼만 하면 아기 낳는단 말이예요. 너무 무경험자로 아이를 기르는 것입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아침에 일어날 때 오늘 내 아이를 최악으로 기르리라, 비참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할수만 있으면 야단치고 잔소리하고 모욕을 주고말겠다, 이런 결심, 하지 않아요. 
그런데 부모노릇을 하다보면 이건 거의 전쟁을 치르는 수준이 됩니다. 끝도 없이 일이 벌어집니다. 자녀와 충돌하게 되고 긴장과 위기상황이 오고, 가슴이 터지는 일들이 발생하고, 아 여기서 이제 어쩌면 좋지?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나는 아이를 사랑하는데, 정말 잘 키우고 싶은데 내 마음과는 달리, 내가 아직 버리지 못한 옛성품들이 아이를 기를 때 다 나와버립니다. 

오늘 말씀 4절을 깊이 생각해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에게 최고의 자녀양육을 두가지로 알려주십니다. 한 가지를 금하고 한 가지를 명합니다. 금하는 것은 뭔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명하는 것은 뭡니까?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라는 것입니다. 이대로 하면 최고의 자녀양육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최악의 자녀양육은 뭔가요? 자녀를 노엽게 하는 거죠. 그리고 내 양육에 주님의 훈련과 훈계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내 가정 안에 이 두가지가 있는가? 현재 나의 자녀 양육에는 뭐가 빠졌는가? 무엇을 보완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점검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최고의 자녀양육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4절 아버지들만 한번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이것이 뭘까요? 어떤 경우에 자녀들은 노엽게 될까요? 이 노엽게 한다는 말은 자녀의 마음을 화나게, 성질나게, 상처받게, 격동시키는 것,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아이들 말로 하면 열받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나님은 부모들에게 하셨을까요? 이게 부모가 가장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예요. 자녀를 노엽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아버지 어머니들이 아무 생각없이 범하는 최악의 양육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폴 투르니에의 책을 잘 읽어보세요. 부모들이 가장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죄책감과 은혜‘를 보시면 잘 나옵니다. 

죄책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정말 자기가 실제 잘못을 했을 때 당연히 가져야 하는 진정한 죄책감이 있고, 실제로 잘못을 하지는 않았는데도 죄인처럼 느껴지는 ‘거짓된 죄책감’이 있습니다. 이 거짓된 죄책감은 그 사람의 판단력을 혼란시키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으로 서지 못하게 하는데 이 거짓된 죄책감은 대부분 어릴 때 집에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누가 이 죄책감을 집어넣는가? 그 아이의 부모입니다. 예를 들어 형은 온순하고 동생은 와일드합니다. 둘이 싸울 때 보면 대부분 동생이 형을 괴롭힙니다. 꼬집고 때리고 빼앗고 그래요. 그런데 엄마가 둘이 싸우는 것만 보면 너는 형이 돼가지고 그거 하나를 양보못하니? 동생 하나를 데리고 못놀아? 언제 철들래? 

그러면 형은 거짓된 죄책감을 가집니다. 이게 자녀를 노엽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노엽지만 반항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엄마 사실은 이게 이렇구요, 라고 말할 엄두가 안납니다. 그러면 비겁하고 위축되고 내가 나쁜 놈이구나! 약자의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동생은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 이것봐라 이게 먹히네! 엄마를 속여먹는 재미가 듭니다. 

그런데 이 노엽게 하지 말자 라는 말씀은 아이를 절대 꾸중하지 말고, 절대 회초리를 들지 말자! 왜?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노엽게 되니까, 상처받으니까! 이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 노엽게 하지 말라는 건 꾸중이나 채찍을 아끼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잠언13:24절에 보시면 초달을 하라고 되어있습니다. 초달은 회초리거든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그랬어요. 잠22:15절에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쫒아내느니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꾸중과 채찍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뭔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제가 말씀드립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앞에서 스스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문맥을 보세요, 자녀양육 4절 말씀이 나오기 전에 부모가 개인적으로, 부부지간에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옛사람의 습관을 버리는 일, 이게 성령충만입니다. 부부지간에 사랑과 섬김을 보여주는 거예요. 5:21절 한번 가볼까요? 그리스도를 두려워함으로 서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집안에서 자녀들이 부모가 주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서로 섬기는 모습이 자녀들에게 삶의 안정감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부부가 가정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는가 하는 것은 어린 자녀들의 얼굴 표정에 나타납니다. 한 가정의 힘은 부부간의 두터운 신뢰와 지지입니다. 

엄마가 아빠를 대할 때, 엄마가 주님을 경외하듯이 아빠를 높이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녀들은 그것을 보고 배웁니다. 엄마 아빠가 아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집에 흘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최고의 안정감을 가집니다. 집안에 정서적인 안정감이 흐르면 아이들은 노여움이 없고 자연스럽고 여유있고 활발하고 생기가 돌게 됩니다. 

최고의 자녀양육은 부모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요즘 젊은 목사님들 부부와 같이 만나 얘기를 나눕니다. 아빠들에게 제가 얘기합니다. 아빠하고 아들하고 함께 노는 것을 계발하라고 말합니다. 저는 혜진이와 노는 것은 어릴 때부터 얘기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아들을 키워보니 아들하고는 대화가 힘들어요. 그래서 초등학생 때 제가 대은이하고 놀았던 것은 축구, 족구, 배드민턴, 오목, 알까기, 넓은 공터에서 던지기, 지금은 탁구, 뭔가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요즘 대세는 ‘프렌디’랍니다. 프렌드같은 대디 합성어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저는 이 말씀에서 가정은 아이들에게 사람사이에는 친근감 친밀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 이걸로 이해합니다. 아이들은 친밀감을 몸으로 배워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을 이미지로 배웁니다. 부모가 서로 냉하고 집안 분위기가 썰렁하면, 아 세상이 참 차갑구나 이런 이미지를 배웁니다. 

부모가 친근하고 서로 장난도 치고 웃기기도 하고 그러면, 아 세상은 따뜻한 곳이야 이 이미지를 배웁니다. 신앙교육을 할 때도 제가 갖고있는 생각은,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다 이 한가지 이미지를 떠올리면 성공이다 생각합니다. 집안에서는 많이 웃을 수 있으면 최고입니다. 집안에서는 서로 장난도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깔깔거리고 웃는 시간, 아이들은 그런 기억속에서 세상을 배웁니다. 

MBC 여자 아나운서들이 실험을 했는데요, 두 개의 유리그릇 안에 밥을 퍼놓고 한쪽 그릇 표면에는 고맙습니다! 라고 써놓고 한쪽 그릇 표면에는 짜증나! 라고 써놨어요. 그리고 시간나는 대로 이쪽에는 고맙습니다. 사랑해, 너 예쁘다! 사랑의 말을 해줍니다. 저쪽 그릇에는 짜증나! 너 미워! 빈정대는 말을 해줍니다. 그리고 3주 후에 양쪽 그릇에 밥이 어떻게 변했는가 봤는데, 놀라운 현상이 나왔어요. 

고맙습니다, 너 예쁘다, 사랑해! 라고 말해준 밥그릇, 곰팡이가 하얗고 몽글몽글하게 피었구요, 짜증나, 너 미워 빈정댄 밥그릇은 곰팡이가 아주 시커멓고 보기 흉하게 피었어요. MBC 말의 힘이라는 실험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노여움을 주지 않는 최고의 비결은 뭐냐? 친근감 친밀감입니다. 따뜻한 부모, 우리 엄마 우리 아빠는 나하고 친해, 우리 엄마 아빠는 둘이 친해! 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집은 아이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무슨 상이든지 잘했으면, 그날 반드시 특별한 것을 먹습니다. 맥도날드 라도 나가서 먹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그게 필요합니다. 


둘째, 최고의 자녀양육은 원칙을 가지고 엄하게 훈육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격함입니다. 친밀감과 엄격함은 정 반대의 말 같지만, 우리 하나님의 두가지 성품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 부모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합니다. 그래서 4절, 우리 어머니들만 한번 읽어보십시오. 주님의 훈련과 주님의 훈계로 기르라! 고 했어요. 주님의 훈련으로 기르라, 자녀양육에는 반드시 훈련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훈계로 기르라, 반드시 원칙이 있고 그 원칙과 룰을 깨뜨릴 때는 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까 말한 자녀양육에서 친근감 친밀함, 그 첫번째 원리가 전제되어야만 효과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노여움이 있으면 훈육은 효과가 없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자녀양육은 자녀가 태어나서 세 살까지 거의 끝난다고 봅니다. 세 살까지 훈육이 되어야 그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초리는 초등학교 때까지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 이후에는 늦습니다. 왜냐하면 사춘기 반항이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부터 시작이 되요. 

왜 그런가? 이때는 이미 그보다 훨씬 어릴 때 노여움이 쌓였다는 뜻입니다. 그 잔뜩 쌓인 노여움을 사춘기 때 분출시킵니다. 중학교 들어간 이후에는 쌓인 게 많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왜 말을 안듣지? 그때 이미 조금 늦은 거예요. 노여움은 아이가 부모에게 반항할 힘이 전혀 없는 서너살 이때부터 쌓입니다. 이때는 부모가 절대권력을 가지고 아이를 다루는 시기입니다. 이때 훈육이란, 언제 꾸중과 회초리와 벌을 받게 되는가? 이것이 명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잠언 22:6에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훈련시키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때 어떻게 훈련을 시킬 것인가? 공정함과 일관됨입니다. 훈육은 공정하게, 일관되게 해야 효과가 있어요. 다시 말해서 아이가 ‘나는 어떤 경우에 엄마에게 혼나는가?’ 그 경우를 알 수 있고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는 거예요. 엄마의 기분따라 똑같은 일에서 혼날 때도 있고 그냥 넘어갈 때도 있게 하면 안됩니다. 땡깡을 부리거나 계속 울면 그냥 져주는 엄마들이 있어요. 

대은이는 어렸을 때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맴매 하려고 하면, 사정없이 울다가 토합니다. 토하면 상황이 끝날거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애기가 토하면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타협하면 안됩니다. 애기가 토했네 그러고 상황을 종결해버리면 아이는 거기서 놀랍게 깨달음이 얻습니다. 부모를 다루는 잔기술이 늘어버립니다. 이 훈육은 다혈질 점액질 부모들이 잘 안됩니다. 

자녀양육에서 부모가 어려운 것 중에 ‘안돼!’가 있습니다. 우리 집은 무엇이 안되는가? 그것은 왜 안되는가? 그 이유와 원칙이 분명하면 좋습니다. 그 이유가 아이들이 이해할만한 이유여야 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안돼! 했을 때 그것은 아빠에게 가도 안돼! 여야 합니다. 엄마는 NO! 했는데 아빠는 그걸 YES하면, 아이는 양쪽의 틈을 노리는 잔머리가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 혜진이나 대은이가 아빠 친구네 집에 자도 되요? 물어볼 때, 엄마가 뭐라고 하시던? 엄마가 안된대요, 그러면 아빠도 안돼! 같이 나가줍니다. 엄마가 아이를 회초리로 혼내고 있을 때, 아빠가 ‘여보 이제 그만해!’ 아이 보는 앞에서 말하면 안됩니다. 그때는 아내를 잠깐 딴 방으로 불러서 아이 안보는데서 합의를 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하셨을 때 어떻게 하셨는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십계명이 있고, 언제 죄가 되는가? 언제 벌을 받는가? 어떤 짓을 할 때 어떤 벌을 받는가? 신명기에 모두 적어놓으셨습니다. 왜 그런가 다 적어놓으셨습니다. 가장 크게 혼나는 벌은, 하나님을 놓고 다른 신이나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입니다. 또 혼나는 짓은, 같은 이웃끼리 돕지 않고 약한 자 가난한 자를 소외시키거나 짓밟을 때입니다. 

이런 잘못을 범할 때, 하나님은 여러번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정말 말을 끝까지 안듣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70년 포로로 보내십니다. 그것도 완전 오픈하여 미리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양육에는 일관되고 공정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잠언3장에 보면,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여호와는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하는 것처럼 징계하신다! 이것은 친 아버지 친 어머니는 친 자식을 반드시 징계하고 훈육을 하여 얽힌 것을 바로잡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추천하는 이 책, 하임 G 기너트의 '부모와 아이사이'에 보면,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되 부모의 감정과 아이의 감정은 꾸중 중에서도 따뜻하게 하라 그래요. 혼낼 때 내가 성질나서, 내가 참을 수 없어서 혼내면 그건 훈육이 아니고 노여움이 쌓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미숙한 상태로 있는 것이 가장 나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최고의 자녀양육의 비결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대로 다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저도 실수를 많이 했고 혜진이 네 살 때, 카펫트에 아기 분 흘려서 망쳤다고 매를 많이 때렸는데 혜진이가 네 살 때 가장 큰 기억으로 그날 맞은 걸 말합니다. 제가 화나서 때렸거든요. 그래서 상담학에서 자주 말하는 것이 뭐냐? 문제아는 없다,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다! 그래요. 

부모인 내가 성령충만하여 옛모습을 버리고 있는가? 이것이 치명적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부부는 친한가? 서로 안아주고 머리 맞대고 대화하는 모습을 자녀들이 보는가? 내게 게으름의 습관이 아직 남아있는 동안 아이들에게는 그 모습이 복사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짜증을 내고 혈기를 부리는 동안 아이들 마음에도 짜증과 혈기가 쌓이고 있습니다. 일관되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게 아이를 다루면 아이는 노여움이 쌓입니다. 

마땅히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 그것을 아끼면 그것은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오늘 내가 심은 것이 내일 싹이 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이를 양육할 것인가 최고의 양육은 뭔가?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향하여 부단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양육하셨는지 그분의 일하심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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