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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에 씨를 뿌려놓고 (막 4: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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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씨를 뿌려놓고 (막 4:26-29)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 함께 있고 싶은 사람

이 아름다운 날,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고요히 스며들기를 기원합니다. 입하에서 소만을 향해 가는 계절이어서인지 날이 무척 더워졌습니다. ‘작은 만족’을 느끼려면 영혼이 고요해져야 하는 데, 여러분, 고요하십니까? 골방과 광장을 오가는 것이 삶일진대, 저는 요즘 골방의 고요를 누리지 못하고 지냅니다. 연회 체육대회를 앞두고 있어서 감신 운동장에서 배구연습을 하고 있는데, 선배 목사님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귓속말을 했습니다. “감리사가 되니 하기 싫은 일도 해야 되고 힘들지?” 제 성향을 잘 아니까 놀리느라고 한 말이지요. 그래서 나도 싱긋 웃으며 한참 째려봐주었습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다보니 함께 있는 것이 좀 부담스러운 사람들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이들이 있을 겁니다.

저는 우선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좀 힘들어집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굳이 알아야 할 일도 아닌데,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늘어놓는 사람을 만나면 몸이 먼저 반응을 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함께 있기 싫은 사람이 어떤 부류냐고 물었더니 나이별로 대답이 다양했습니다. 남을 숨 막히게 하는 사람, 잘난 척하는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 가식적인 사람, 신령한 척하는 사람, 권위적인 사람, 요구가 많은 사람, 입만 열면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 따분한 사람…. 그러고 보니 저 자신도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더군요. 첫째는 플러스 유인성의 사람입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를 만나고 나면 제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말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이미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마이너스 유인성의 사람입니다. 

그는 만나는 이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불어넣고, 결과적으로 맥이 빠지게 만듭니다. 오랫동안 그런 이들과 함께 지낸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과 표정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여기 판단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고, 표정이 어둡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또 포용의 언어를 사용하고, 표정이 5월의 햇살처럼 싱그럽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함께 있고 싶으십니까? 취향이 좀 이상한 분이 아니라면 답은 뻔합니다. 그런데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플러스 유인성의 사람입니까? 마이너스 유인성의 사람입니까?

• 예수의 호명

예수님은 가장 대표적인 플러스 유인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은 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마치 촉매처럼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물론 그 변화의 가능성은 각 사람 속에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발견하고 호명해주셨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은총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벧후1:4b)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말이 참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동방교회는 이런 것을 일러 신화(神化, deification)라 합니다. 우리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우리의 날갯짓을 가로막는 것은 교만과 질투, 염려와 미움입니다. 그렇기에 신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충만한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해가 떠오르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예수님의 빛이 비춰지는 순간 우리 속에 있던 어둠은 스러지고 맙니다. 

주님은 갈릴리 호수의 어부 시몬을 불러 베드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시대에 대한 염려로 의기소침해졌던 나다나엘에게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을 보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아내는 데 명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싫고 좋음의 척도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거나,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파악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인간관계의 낭비입니다. 적절한 습도와 온기를 만나지 못해 그렇지 정말 큰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현재 모습만 보고 그를 규정해버립니다. 말이 올가미가 될 때가 있고, 날개가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듭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떠올려보십시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하략)”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름을 불러줌’입니다. 시인은 누군가가 자기를 적절한 이름으로 호명呼名해 주기를 소망합니다. 호명해 준 그에게로 가 꽃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만나는 이들의 가슴에서 무엇을 호명하고 있습니까? 탐욕스럽거나 사나운 혹은 비열한 존재를 호명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따뜻하고 온유하고 덕스러운 존재를 호명하고 계십니까? 이러한 호명행위는 일종의 파종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만나는 이들의 가슴에 뭔가를 심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일 수도 있고 표정이나 몸짓일 수도 있습니다.

• 저절로 자라는 씨

예수님은 종종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저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로도 통용됩니다. 당시 유대 세계를 다스리던 정치 세력은 로마입니다. 예수님의 언어는 절묘합니다. 통치의 주체였던 로마의 자리에 하나님을 대입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나라는 소수의 사람만이 행복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행한 세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이 친밀한 우정을 나누는 벗들의 나라입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나라는 삶을 피폐하게 하고 사람들을 원수가 되게 하지만, 벗들의 나라는 서로 돕고 돌보고 북돋워주는 나라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너무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았는데,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는 말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이 비유의 핵심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저절로’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릴 것입니다. 농부들은 퇴비를 뿌려 밭을 기름지게 만들어 놓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풀을 뽑아주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비유에서 ‘저절로’라는 단어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대체 하나님 나라의 어떤 면을 가르치려 하신 걸까요? 그런 의문을 가지고 이 비유를 보니 사용한 단어가 심상치 않습니다. 우선 씨 뿌리는 사람을 지칭한 ‘어떤 사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안트로포스anthropos’, 곧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주목해야 할 단어는 ‘자다’와 ‘일어나다’입니다. ‘자다’라고 번역된 ‘카테우데katheude’는 ‘죽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일어나다’라고 번역된 ‘에게이라타이egeiretai’는 ‘부활’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비유는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는 한 계절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싹이 트고 자라나 마침내 결실을 맺는 일체의 과정을 보고 싶어합니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종종 좌절되곤 합니다. 그것이 땅에 씨를 뿌리는 일이라면 조금 실망이 되긴 하지만 내년을 기약하면 되지만, 그것이 인간관계에 관련된 문제이거나 역사를 변혁시키는 일이라면 낙심되는 게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들려주고 계십니다. 세상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곧 5.18 광주 민주화 항쟁 31주년이 됩니다. 제도적 민주화는 상당부분 발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뭔가에 더욱 짓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넘나들며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소유욕과 과시욕을 부추깁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규정해버립니다. 이전에는 함께 가야 할 목표가 분명했지만 이제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느라 남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공동체성은 더욱 파괴되었습니다. 희망을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비유는 그런 우리의 염려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가 뿌린 씨가 죽은 것이 아니라면 그 씨는 때가 되면 기어코 싹이 트고 자라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끝없이 뭔가를 시도하고 성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결실이 보이지 않으면 안달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조용히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자란다는 말은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씨앗을 싹 틔우고, 자라게 하고, 결실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도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돕는 자이지 자라게 하는 자는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했던 말은 바로 이런 사실을 절묘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

• 평화 훈련

이제 본문의 마지막 대목에 주목할 차례입니다. 예수님은 씨앗의 성장 과정을 차례로 열거하십니다.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누가 모른답니까? 왜 굳이 이렇게 세세히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생명의 원리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급하다고 해서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 시간을 조율할 때 삶은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발설하신 때는 로마 제국의 착취와 학정으로 민심이 들끓고 있던 때입니다. 과격파들이 득세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저항운동가들에게 동조하지 않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반동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흥분하지 않고 냉철하게 생명의 원리를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역사는 퇴행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확신입니다. 

평화로운 세상, 사람들의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은 더디더라도 반드시 올 것입니다. 평화로운 삶은 우리가 성취해야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평화의 섬 제주도를 지키기 위해 강정 마을에서 수고하고 있는 이들을 비롯해 정말 많은 평화의 일꾼들이 수고의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좋은 세상의 씨를 뿌리는 이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장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고 스스로 황폐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는 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 혹은 뜻이라는 씨가 뿌려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착한 마음으로 듣고, 굳게 간직해야’(눅8:15)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희망과 사랑을 파종하는 착한 농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가슴에 평화와 사랑의 씨를 뿌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척박한 역사 속에도 같은 씨를 뿌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씨를 뿌린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비난과 비평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창조적인 비평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비평이 비난이 되면 안 됩니다. 누군가를 책망할 필요를 느낀다면, 그의 어떤 태도나 행동을 고쳐줄 필요를 느낀다면 그가 한 일을 먼저 칭찬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먼저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세 가지씩 생각한 후에 말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십시오. 가까이 있는 사람, 특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의 좋은 점을 먼저 떠올려보십시오. 그러면 관계가 달라집니다. 평화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농부들이 논 일로 밭 일로 분주한 철이 왔습니다. 우리들도 역시 씨 뿌리는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뿌리는 씨앗이 우리 혹은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을 이룹니다. 더디더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기뻐하며 사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역사를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의 일에 부름 받은 자의 기쁨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아내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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