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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회함 없도록 (잠 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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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함 없도록 (잠 5:12-14)


손영미 님의 선생님처럼 이란 감동 넘치는 글을 소개합니다. 
새 학년이 된 기대감으로 4학년 6반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여느 교실과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책상 옆에 학생 책걸상 하나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속으로 ‘아! 말썽꾸러기가 있으면 여기 앉혀서 벌을 주려나 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뒤 바로 그 애의 자리라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앓는 그 애는 3학년 때까지만 해도 언제나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새로 담임을 맡으신 선생님은 아이를 맨 앞에, 그것도 선생님 바로 옆에 두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감당해 내려는지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업 중에도 멋대로 돌아다니고 떠들던 아이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자주 아이에게 눈을 맞추었고 이야기도 곧잘 해주었습니다. 반 아이들도 선생님을 따라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준비물을 챙겨 주었습니다.
비 오던 날, 그 아이는 무섭다며 선생님 허리춤을 꼭 끌어안았지만 선생님은 실은 내색 없이 아이를 허리에 매단 채 수업을 계속하셨습니다. 

또 어느 날은 온종일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수업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상상하면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지만 우리 모두 당연하다는 듯 진지하게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비가 올 때면 땀에 젖은 아이 손을 잡고 수업하시던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 아이가 무척 똑똑해졌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치유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어른이 우리 선생님처럼 소외된 아이들을 바라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도 선생님을 통해 단순히 지식을 배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만남의 복 중 하나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권의 위기라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학교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뜻도 됩니다. 물론 그것은 선생님만의 잘못을 아닙니다. 오죽하면 촌지가 두려워서 선생님들의 수고에 감사를 전하는 스승의 날이 선생님이 아이들을 만나서는 안 되는 휴무일이 되어야만 합니까? 
그러나 더 큰 위기는 교회학교입니다. 좋은 선생님을 찾기도 점차 어렵다고 하지만 교회학교 학생들의 수가 줄고 있다고 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자라나는 세대가 없다는 것은 결국 교회의 위축을 가져올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먼저 가르치는 자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말년에 아들처럼 귀하게 여기는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여기 충성된 사람이야말로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세상에 계실 때 주셨던 말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내용은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선생이란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충성된 직분자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충성된 자의 자격을 말할 때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Faithful(신실하고) 둘째는  Available(쓸모 있고) 셋째는 Teachable(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정말 주님이 믿을만한 하고 주님 앞에 쓸모 있는 자가 되어야 하며 자기 자신이 먼저 가르침을 받을 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라야 먼저 자신이 주님께 배우기를 힘쓸 것이요 주님께 배워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사는 먼저 자신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계속해서 자라가도록 단근질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권면합니다. 왜 이런 권면을 하는가 하면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 사회는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 제자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자질과 더불어 부단히 자기를 성장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배우는 자로서의 자세를 가질 때 또한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울러 시대에 맞게 변화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효과적인 가르침은 오직 변화된 인격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자신이 변화될수록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욱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신 바울 사도처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이렇듯 나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좋은 일꾼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대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일꾼 삼으시고 교사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하며 세우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충성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 화가 밀레는 25세 때 파리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때 밀레는 드라로슈라는 유명한 그림선생님에게 배우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의 제자들 대부분은 밀레에게 친절하지 않았고 그를 시골뜨기라 부르며 무시했습니다. 
어느 날, 그림 수업 후 가진 평가시간에 선생님은 그림 하나를 지목하며 누가 그린 그림인지 물었습니다. 밀레는 자신의 그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이 그림은 우리 학교 학생들 가운데 제일 잘 그린 그림이야”라고 칭찬해주었습니다. 밀레는 선생님의 칭찬에 힘입어 친구들이 노는 시간에도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정말 아쉬운 오늘날입니다. 그러나 이는 선생님만의 몫은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의 몫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칭찬은 숨겨져 있는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아이가 조금 부족한 듯 보일지라도 칭찬을 아끼지 마십시오. 그 아이에게 숨겨진 능력이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에게 꾸중보다는 칭찬을 한 번 더하는 하루가 되십시오.
칭찬이 책망보다 더 안전합니다. 좋은 선생님만 찾지 말고 나 자신이 먼저 좋은 선생이요 좋은 부모요 좋은 이웃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누가 참된 교사인가 할 때 참된 교사란 주로 격려하는 자요, 동기 유발자입니다. 그는 연주자가 아니라 연주자들을 자극하고 지도하는 지휘자일 뿐입니다. 반면에 학습자는 주로 연구자이며 발견자요 실행자입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교사는 자신이 하는 일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참된 교사는 격려자로서 3가지 교육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목표는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연속적으로 변화시키려면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생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를 넓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목표는 학생들에게 배우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배우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것은 평생 동안 계속 진행됩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계속 배웁니다. 그리고 배우고 있는 동안 살아있는 것입니다. 오늘 배우는 것을 중단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일 사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셋째 목표는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참된 교사는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자입니다. 만약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로 있어야 하는 교육이라면 그 학생을 교육상의 불구자 혹은 교육학상의 기형아나 환자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또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진리를 전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사는 학생들에게 좋은 의사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의사 전달자인 교사가 되려면

첫째로 공통점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접촉점입니다.
둘째는 의사전달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의사전달은 인격과 인격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다리가 무너지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셋째는 좋은 전달방법을 가져야 합니다. 교사는 개념이나 느낌이나 행동을 언어를 통해서 전달하는데 이때에는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하나가 준비이고, 다른 하나는 표현력입니다. 준비는 학생에게 가장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하게 해 주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표현력은 교사가 말하고 있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장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말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교사의 인격은 배우는 자에게 신뢰를 가져옵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믿고 따를 때 가르침이 효과적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학생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긍휼입니다. 교사들의 사랑이 학생들에게 가장 큰 학습의 동기유발이 됩니다. 셋째 학생들이 무엇을 인식하는가 하는 것은 당신이 가르치는 내용에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학교 교사는 영적인 것을 다루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먼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기 전엔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는 교사는 생명을 살리는 선생이 아니라 생명을 죽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님의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합니다. 말씀의 교사, 기도의 교사가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 사람을 살리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라고 고전 4:20은 말씀합니다. 성공은 인간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폴란드의 조그만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웬일인지 독일군이 이 마을에는 나타나지 않아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유태인 앞에 드디어 독일군이 나타났습니다. 일부는 마을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학교로 가 학생 중에 드문드문 섞여있는 유태인 어린이들을 끌어내려고 하였습니다.
코르자크란 이름을 가진 선생님은 자기 앞으로 몰려온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 팔로 꼭 안아 주었습니다. 독일군은 이들을 떼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코르자크 선생님은 군인을 막아서며, “가만 두시오. 나도 함께 가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자, 우리 함께 가자. 선생님이 같이 가면 무섭지 않아?” “네, 선생님.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라 트럭에 올랐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독일군이 선생님을 끌어 내리려 하자, “어떻게 내가 가르치던 사랑하는 이 어린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이요”하며 선생님은 아이들과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마침내 트레물렌카의 가스실 안으로 아이들의 손을 꼬옥 잡고 앞장서서 들어갔습니다. 자신은 유태인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함께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학살된 동포들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세운 기념관 뜰에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 팔로 꼭 껴안고 코르자크 선생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슴 속에 우리를 두 팔로 꼭 껴안고 있는 예수님의 형상이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 뜨거운 가슴을 느끼시는 하루가 되십시오.
우리가 두려움 앞에 서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들의 두 손을 꼭 잡고 함께 견뎌주십니다. 그 따스함으로 학생들의 손을 아이들의 손을 자녀들의 손을 꼭 잡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배우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날 평생 교육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조기 교육의 중요성입니다. 성격과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들을 어떤 바탕으로 키워내느냐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사의 중요성도 이야기하지만 또한 가르침을 받는 자세 역시 정말 중요합니다. 그 본바탕을 만들어 주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신뢰할 수 있는 어머니가 될 때 아이들은 그 어머니에 대한 신뢰를 통해 사회에 대한 신뢰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도 줄 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도가 지나치게 되면 자기밖에 모르는 사회 부적응 자가 되기 쉽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과보호가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냥 오냐 오냐 하고 키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이 마음대로 다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 학교에서 체벌을 금한다고 하는데 사실 성장한 후의 체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체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60개월 이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치되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예배가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난 뒤 이제 유치원과 더불어 자녀들을 교회학교에 보내어 하나님 신앙이 몸에 배도록 이끌어줄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번 강조하는 것이지만 사회적인 배움은 좀 쳐져도 좋습니다. 

하지만 믿음에 관해서는 결코 뒤로 쳐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어떤 것으로도 예배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의 생각에 온전히 사로잡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자녀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는 진짜 사랑을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세상에서의 번영이 한낱 들에 핀 꽃의 영화와 같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들풀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곧 뽑혀 버려지거나 가축들의 사료로 던져질 것입니다. 하나님 신앙이 빠진 사회 지식은 우리 자녀들을 더 깊은 타락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밑거름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은 가르치지 못해도 오직 한 가지 하나님 신앙만은 철저히 가르치십시오. 아울러 교회학교와 함께 자녀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힘쓰십시오.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왜 이런 탄식을 합니까? 그 결과로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큰 악에 빠지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실 세상 그 어떤 것을 다 얻었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면 그건 다 헛것입니다. 온 땅을 뒤덮었다가도 해가 뜨고 나면 이윽고 사라져버리는 아침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우선은 행복을 위해서인데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행복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된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술에 의지하고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고 이윽고는 마약에 손을 대보지만 그런다고 해서 만족한 삶이 되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허무할 뿐입니다. 인생이 덧없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다가 견디기 힘든 어떤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합니까? 이 무의미한 세상 더 살아서 무엇 하리 하고 그만 목숨을 끊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참는 훈련을 하지 못했어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해요. 그래서 항상 달라고만 해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만큼 내게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잠깐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결코 영원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오직 주님 안에서만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과 함께 있을 때만 우리에게 참된 행복이 있고 우리가 바라고 축복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그토록 강조하신 것이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마 5:19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자는 먼저 자신이 본이 되면서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요 배우는 입장에서는 그 본을 따라 또한 순종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순종해야 합니까? 
물은 99도까지는 액체지만 100도가 되어야 비로소 기체가 됩니다. 반대로 1도까지는 액체지만 0도가 되어야 고체가 됩니다. 변화에는 일정한 시간과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완성은 순식간입니다. 마지막 1도를 기다리지 못해 완성을 못 보고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종들이 마지막 여섯 번째 돌 항아리의 아귀까지 물을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니 그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 갖다 주기까지 순종할 때 물이 포도주가 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어쩌면 물을 갖다 붓는 중간에 조금씩 달라지는 조짐이 가끔 보였더라면 얼마나 이해하기 쉬웠을까요. 하지만 그들의 순종은 물을 돌 항아리의 아귀까지 채우고 또다시 그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데 까지 요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따랐고 그 결과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귀한 역사의 한 동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두 번째 항아리를 채우기 시작했을 때 저 바닥 밑에서부터 포도주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면 좀 더 쉽게 순종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의 완성은 그렇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물을 채우는 듯 보였지만, 그들은 순종과 인내를 하며 마지막 항아리의 아귀까지 채웠고 또다시 그 물을 떠다 연회장에게 갖다 주기까지 함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제 채워야 할 것은 순종과 인내입니다. 그것도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첫째요 그대로 따르기가 결코 만만치가 않다고 하는 것이 또 다른 이유입니다. 아니 어떻게 물을 떠다가 그것도 손발을 닦는데 소용되는 물을 담는 항아리에 담겼던 물을 연회장에게 떠나줍니까? 지금 왜 그 일이 생겼습니까?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근데 포도주를 장만하기는커녕 난데없는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웬 난데없이 돌 항아리에 물을 떠다가 그것도 아귀까지 채우라고 하는지 그들은 영문을 몰랐습니다. 그 물을 떠다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할 때 역시 그 이유를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참고 순종하였더니 놀랍게도 그 떠간 물이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바뀌었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물을 채웠을 때까지는 분명 물이었습니다. 연회장에게 떠다 줄 때가지도 물이었습니다. 근데 연회장이 그 물을 받아들고 이게 뭐냐고 했을 때 종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떠다가 연회장께 갖다 주라고 해서 떠왔습니다. 차마 돌 항아리의 물이라고는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연회장은 물을 전달 받은 것이 아니라 질 좋은 포도주를 전달받았고 그때 하인들의 눈도 휘둥그레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 안에 이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다 어린아이들처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전해 주시는 예언의 말씀들을 하찮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와 교사들의 가르침을 헛불로 듣지 마세요. 귀담아 듣고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 힘들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가능합니까? 있다면 한 가지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요 그 능력이 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가르침을 끝까지 따라야 하고 순종하여야 결코 후회함이 없는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자녀들이 행복한 인생 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들 역시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십시오. 목사와 교사의 인도함에 철저하게 순종하십시오. 비록 목사는 부족하지만 목사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약해도 하나님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 더 감사하고 내 끝까지 순종하기를 정말 잘했노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도 감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신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우리들의 삶을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모든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풍족한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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