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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그 이후 3 : 말씀을 주신 주님 (눅 24: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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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그 이후 3 : 말씀을 주신 주님 (눅 24:30-35) 
 
 
❚말씀의 감격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몇 해 동안이나 신앙생활을 하셨습니까? 아마 신앙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도 계실 것이고 적어도 수십 년 이상 신앙생활을 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신앙생활 하는 동안 말씀은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제법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은 최소한 수천 번 이상의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으면서 “야, 오늘은 정말 설교를 듣는데 은혜가 되더라, 마음이 뜨겁더라” 하신 적은 얼마나 되는지요? 물론 저를 비롯해 모든 설교자들은 이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설교를 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고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라지요.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야구선수 중에 정말 잘 친다는 대선수들도 고작 타율이 3할 조금 넘습니다. 열 번 타석에 들어와 세 번 정도만 안타를 쳐도 훌륭한 선수라는 뜻입니다. 홈런은 말할 것도 없고요.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번 설교하는 중에 열 번 다 성도들의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그러기를 바라고 최선을 다해 설교준비를 하지만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과연 3할 타자, 3할 설교자나 될까 의문입니다. 홈런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크게 받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은 꼭 필요한 체험입니다. 그 맛이, 그 체험이 너무 귀하고 놀랍습니다. 세상 그 어떤 좋은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맛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3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세상에서 제일 단 맛을 내는 것이 꿀이라면 말씀의 맛은 그 꿀보다 백 배 천 배는 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또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말씀이 달구나, 이렇게 맛있구나 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지요? 있다면 여러분은 복 받은 성도들입니다. 반대로 신앙생활 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고 그 놀라운 맛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얼마 전 다른 교회를 다니는 성도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소연 하는데 자신도 출석하는 교회에서 말씀의 참 맛을 느껴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큰 책임감도 느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의 첫 번째 사명은 무엇일까요? 

시편 23편에 나온 것처럼 막대기와 지팡이로 양을 인도하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는 일(4절)이나 병든 양을 돌보는 것도 중요한 사명이지만 분명 목자의 첫 번째 사명은 양떼들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좋은 꼴을 마음껏 뜯도록 하는 일(2절)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의 첫 번째 사명은 성도들에게 말씀의 꼴을 잘 먹이고 성도들이 그 말씀의 참 맛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만큼 제가 더 최선을 다하고 더 노력해야겠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저를 비롯해 모든 설교자가 선망하고 반드시 닮아야 할 최고의 설교자는 누구일까요? 세상에 훌륭한 설교자가 많지만 단 한 분만 뽑으라면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역사 상 그 누구도 주님처럼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친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 말씀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주님 말씀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다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놀라고 감탄했습니다(막 1:27). 주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어서 항상 듣던 서기관들의 가르침이나 설교와 너무나 다르다고 하는 놀라운 평가를 들었습니다(마 7:29). 

솔직히 저는 이 부분이 너무 부럽습니다. 물론 제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정말 부럽고 욕심나는 것은 제가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칠 때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늘 듣던 말씀과 다르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설교자들이 저처럼 예수님의 설교를 본받으려 하고 예수님의 설교를 연구합니다. 과연 예수님의 설교와 말씀이 어떤 점에서 그렇게 탁월하고 놀라웠을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어떤 결과가 나왔을 것 같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점에서 그렇게 탁월하고 권위가 있는 것일까요?

❚말씀의 권위

그 답은 의외로 너무나 단순합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그토록 탁월하고 권위가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설교학자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연구해보면 주님은 탁월한 설교가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능력도 뛰어나고 특히 비유를 들어 말씀을 풀어나가는 능력이 엄청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 연구한 책도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그토록 능력 있고 권세 있는 말씀이었던 것은 주님의 말솜씨나 설교의 기술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비유도 중요하지만 비유 때문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풀어 잘 전하는 능력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자체에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일즈맨이 물건을 팔면서 아무리 청산유수의 말솜씨와 기술로 팔더라도 정작 상품 자체가 좋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거꾸로 정말 상품만 좋으면 그렇게 멋들어진 말로 굳이 선전하지 않더라도 잘 팔리는 것처럼 확실한 것은 우리가 전하는 말씀 자체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세상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권세와 능력이 그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 자체가 능력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 말씀을 잘 풀어 전달해 주실 때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감화를 받고 삶이 변화된 것입니다. 왜요? 이미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뭇 사람을 뒤집어 놓고 변화시킬 능력과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깨닫습니다. “내가 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을 잘 하고 내가 멋지게 설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잘 전하고 풀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12~1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바로 이 말씀의 능력이, 말씀의 권위가 듣는 이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그들의 생애를 변화시키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바로 이 말씀만 충실하게 전하면 됩니다. 목자가 양떼를 먹이려고 풀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좋은 풀밭으로 인도만 하면 됩니다. 이처럼 설교자나 말씀 증거자는 절대 내가 가르치려 하지 말고, 절대 내 능력이나 말재주로 전하려 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 자체를 그대로 잘 전달만 하면 됩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믿기 때문입니다.

❚엠마오 도상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약 이십 오 리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향해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은 18절에 보면 글로바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실망해서 터덜터덜 시골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을 볼 때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토록 열렬하게 추종하던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시자 너무 실망하고 좌절해서 지금 엠마오라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그간 나누었던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에게는 믿음과 확신을 심어주시려고 나타나셨고, 베드로에게는 사명을 주시기 위해 나타나셨는데 이 두 제자에게는 무엇을 주시려고 나타나셨을까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자신들과 동행하시는데도 두 사람은 주님을 몰라보았다는 사실입니다. 24장 16절을 보세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러고 보면 갈릴리(디베랴)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처음에는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이 제일 먼저 알아보지요. 아마도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변모되어서 못 알아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특이하게도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눈이 가리어졌다는 말은 31절에 나오는 어떤 말과 대조가 됩니다. 어떤 말입니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바로 이 말씀입니다. 눈이 가려져 부활의 주님은 못 알아보다가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이 말은 오늘 본문에서 핵심이 되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무튼 두 사람은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단순히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가는 길을 동행하는 나그네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주고받은 말이 무엇이냐?” 그러자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거기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하는데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확실한데 그 다음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22절부터 보세요.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는 보지 못하고 천사들에게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말을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보았는데 여자들이 말한 것처럼 무덤은 비어있었지만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는 눈이 떠지게 되면 이 말에서 단순히 글씨만 읽을 것이 아니라 어떤 ‘뉘앙스’(nuance)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즉 두 제자가 여인들의 증언과 다른 제자들의 말 양쪽을 다 인용하는데 어떤 쪽에 더 무게를 두고 말하는지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제자가 여자들의 말보다 부활하신 주님은 못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여자들은 분명히 천사한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다지만 다른 제자들은 못 봤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도 의심스럽고 솔직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습니다.” 이런 뜻인 게지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이런 느낌을 읽는 맛이 정말 기가 막히게 답니다.

그러자 주님은 두 제자를 꾸짖듯 말씀하십니다. 25~27절을 보세요.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주님은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모세와 선지자들이 부활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느냐?”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들이란 모세오경과 선지서, 즉 구약성경을 뜻합니다. 그러니 이미 구약성경에 메시야에 대해 분명히 예언되어 있고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부활하시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왜 못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제자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엄연히 성경말씀에 예언되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자신들의 경험과 들은 말을 가지고 판단해서 부활을 못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남의 말이나 자기 경험, 자기의 판단을 더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왜 두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못 알아보았는가? 16절에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못 알아보았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에 눈이 가려져서 못 알아보았는가? 

그것은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과 판단에 더 의지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영적인 눈을 가려서, 영안(靈眼)이 어두워져서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려면 영안이 열려야 하는데 말씀을 의지하고 믿으면 영안이 밝아져 알아보지만 이 두 제자처럼 말씀을 못 믿고 다른 것을 더 의지하면 영안이 가려져 당연히 부활하신 주님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두 사람의 무지와 불신을 꾸짖고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고 풀어주신 것이지요. 그런데도 아직 두 사람은 완전하게 말씀을 깨닫고 영안이 다 열리지 않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 28절부터 나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강권하여 오늘밤에 같이 유숙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제자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실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31절에 보세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주님이 축사하고 떼어주신 떡을 먹자 그들의 어둡던 눈이 밝아져서, 가려졌던 눈이 열려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가려졌던 영안이 열리게 된 것이지요. 그 다음 32절에 나온 말씀이 중요합니다. 같이 읽을까요?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어떤 순간에 그들의 가려졌던 눈이 밝아지고 영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까? 이미 주님이 길가에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지고(헬라어 원어로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눈이 주님이 나누어 주신 떡을 받는 순간 완전히 열려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이유가 뭐인 것 같습니까?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주고 그들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려졌던 눈이 서서히 열리고, 세상 지식과 자기 주장과 세속적인 것들로 인해 가려졌던 영안이 떠져서 주님을 만나고 알아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둘째,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눈이 떠져야 합니다. 세상 것들로 가려진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속사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말씀 위에 든든히 선 교회”가 되어야 하고 우리 성도들이 말씀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성도들은 그 가려졌던 영안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해 결정적으로 두 제자처럼 주님이 축사하고 나누어주신 떡을, 생명의 양식을 받는 순간 영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만나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반드시 이 체험을 해야 합니다.

셋째, 가려졌던 영안이 열린 제자들이 그 다음에 어떤 일을 했냐는 것입니다. 33~36절에 나온 것처럼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지 않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본디 가려고 했던 목적지가 아닌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만나고, 가려졌던 영안이 열리고, 주님을 알아보게 되면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가려고 했던 목적지, 내가 가려고 했던 인생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현장, 부활의 현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실을 증거하고 알리게 됩니다. 부활을 못 믿던 두 사람이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믿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님을 증거하고 전하게 됩니다. 부활을 선포하고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여러분도 반드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믿게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부활의 증인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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