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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준비된 결혼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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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결혼 (창 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18-25)

"부부란 10대에는 서로가 꿈속에서 살고,  20대에는 서로가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가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서로가 체념하고 살고,  50대에는 서로가 가엾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되니까 살고,  70대에는 서로가 고마워서 산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결혼생활은 마냥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결혼’과 ‘결혼생활’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딴딴따다’ 하는 웨딩마치는 결혼의 시작(始作)이요, 행복의 출발입니다. 만약에 ‘딴딴따다’ 하는 웨딩마치를 행복의 완성이라고,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결혼생활은 이혼으로 끝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아직 미혼인 분들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는 없지만, 결혼은 환상(幻想)이지만 결혼생활은 현실(現實)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고,  준비 안 된 결혼이 ‘이혼(離婚)’이나 ‘불행(不幸)’으로 마칠 수 있다면, 준비 된 결혼은 기쁨과 행복(幸福)으로 가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준비 된 결혼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보았습니까? 그리고 준비된 결혼이란 것이 집이나, 가구를 의미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준비 된 결혼은 지식(知識)의 준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신학대학원 학생으로 서로 만나 결혼하여, 지금은 신학교 교수이신 분이 자기의 결혼생활을 돌아보면서 쓴 글을 읽어드립니다.  ‘결혼’과 ‘결혼생활’이 이렇게 다를 줄 정말 몰랐습니다. 만남, 데이트, 사랑고백, 결혼 그리고 갈등, 싸움, 눈물, 고통, 미움, 이혼의 문턱 그리고 깨달음, 회개, 용서 이 단어들은 필자가 지나간 27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생각한 말들입니다.  신학대학원 1학년 말에 같은 반 자매와 약 70일 동안 함께한 추억은 외로움과 사랑의 갈증에 목말랐던 내게 하나의 오아시스였습니다. 사랑은 사귐을 잉태하고 사랑은 결혼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한 가정을 이루는 일에 더 이상의 시간을 버리는 것은 마치 숨을 쉬지 말라고 하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세상에서 이보다 더 매력적인 말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결혼을 하면서 한 가지 잊은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혼에 대한 준비였습니다. 물론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준비 안 된 결혼! 이것은 정말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그 결과가 이렇게 아픈 고통을 안겨 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준비 안 된 남편, 준비 안 된 사위, 준비 안 된 아내, 준비 안 된 며느리, 준비 안 된 시부모... 우리의 결혼은 준비 안 된 것 투성이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이혼의 망령에 시달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랑과 이혼! 우리가 이렇게 빨리 결혼생활의 극과 극을 체험하게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갈등과 싸움, 원망의 눈물, 가슴에 새겨진 미움의 상처, 씩씩거리며 문턱을 넘으려는 이혼의 망령,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지금도 우리 부부는 그때 받은 아픔과 상처를 치료받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더 많은 이해와 인내가 우리 사이에 있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결혼 생활’이 ‘결혼’과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 결혼은 이상이지만 결혼 생활은 현실이라는 사실을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를 회개하게 했고, 회개는 우리 가족 모두를 서로 용서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차츰 성령님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 갔습니다.  만약 우리 부부가 결혼에 대해 충분히 시간을 갖고 준비했다면 우리 결혼 생활은 달랐을 것입니다. 적어도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의 의미만이라도 기본적으로 알았다면 우리는 좀 더 나은 남편과 아내가 되었을 것입니다. 준비가 잘 된 부부는 준비하지 못한 부부보다 훨씬 더 의미 있고 건강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왜 결혼하십니까? 아니 결혼이 뭔가요?  남과 여 두 사람이 결혼하는데...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생각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대부분의 청년들은 결혼식 준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여도, ‘결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서 결혼을 하고, 살아가면서 결혼에 대하여 서로 전혀 다른 태도를 발견합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상대방에 대하여 잔뜩 기대를 했는데... 그 기대를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을 알게 되고, 실망하고 싸우고 불행해 집니다.  

겨우(?) 월 100만원 받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도 최소 일년은 공부해야 자격증을 따서 취직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한 억 단위가 넘는 돈과 최소 4년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대학을 졸업합니다. 그리고는 대부분 졸업과 동시에 백수가 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을 함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행복한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까지것...그냥 하면 되지’ 하면 되겠습니까?  

한국의 고아원에는 ‘고아(孤兒)’가 없다는 것 아시지요!!! 진짜 고아는 15~20%라고 합니다. 물론 조손가정도 당연히 고아로 보기 때문에, 실지로 천애고아는 10%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 이혼가정의 자녀들입니다. 부모가 재산이 충분히 있지만 재혼에 방해가 되어서 맡겨두는 버림받은 자녀들로 고아원은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인구의 1/4인 우리나라,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이래도 별 생각 없이, 준비 없이 결혼하겠습니까?
 
혹시 결혼에 대한 세미나 들어 보신 분 있나요? 책 몇 권이라도 진지하게 읽어 보신 분 있나요?  평생 결혼 안 할 거라면 이런 작은 노력도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결혼 할 것이고, 결혼해서 잘 살고 싶다면... 우리는 올바른 결혼관으로 준비되어야합니다. 아무 생각 없는 결혼이나... 잘못된 결혼은 그 끝이 불행으로 갑니다.  먼저 우리는 ‘나는 왜 결혼을 하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몇 가지 대답이 있지요. 남이 하니까?  부모가 몰아부쳐서. 행복하기 위해서. 늘 같이 있기 위해서. 외롭고 적적해서. 등등.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른 결혼에 대해서 배웁니다. 
왜 성경인가요? 어떤 책도, 어떤 종교도, 결혼에 대해서 성경처럼 말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①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결혼은 다른 어떤 사회단체보다, 국가보다, 교회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즉 결혼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동물의 짝 짓기는 본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그냥 그들의 본능에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결혼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혼자 사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돕는 배필을 지으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2) 하나님께서 여자의 손을 잡아서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셔서 서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확실하게 남녀간에 중매(中媒)를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며, 결혼에는 하나님의 목적(目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결혼의 일번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알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결혼에 문제가 생기면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에게로 갑니다. 만드신 분에게로 가야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현대차가 고장 나면 현대 서비스 센타로 가고, 대우차가 고장 나면 대우 서비스 센타로 가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또 삼성 보험에 들은 사람이 보험금을 라이나보험에 가서 수령합니까?  교보생명보험을 삼성생명에서 타려는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실제로 많은 부부들이 결혼에 문제가 생기면... 변호사에게로 가거나, 친구에게 갑니다. 또 남자는 일단 술집으로 가고, 여자는 무조건 친정으로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심지어 점쟁이에게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이 어디서,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지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변호사나, 친구나 술집이나 친정집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정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결혼은 두 사람으로 시작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 사람으로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남자 +한 여자 입니다.  그러므로 부부의 시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짝지어 주신 것이다." 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시작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마19:6)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우리 가정은 무너진다’(시127;3)는 사실을 잘 기억하여야 합니다.  아멘?

성도여러분,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선(善)하고 우리를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   즉 결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결혼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곧 우리의 풍성함이 됩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그리고 악한 세상에 물든 사람들은 결혼에서도 ‘어찌하면 내가 행복할꼬’ 만을 생각합니다. 배우자의 행복도 나 몰라라 하고, 배우자를 나의 행복을 위한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나를 위한 배우자’ 이런 생각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결혼을 하니까  결혼은 곧 불행이 됩니다, 이혼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정상담소에 상담 받으러 오는 부부중에 자기가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물으면 동시에 서로 상대방을 쳐다봅니다.  

우리 가정의 문제는 다 상대방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나는 문제가 없고, 상대방이 안 바뀌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으로 가득하니... 서로 견딜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행복의 비결을 말씀드리면, 하나님행복이 곧 부부행복이요, 하나님행복이 곧 나의 행복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성도여러분, 사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행복 때문에 고민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목적, 뜻을 이루기 위해 고민하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 뒤에는 당연히 부활과 승천 있지요.  즉 예수님은 나의 행복만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약에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다면... 불행한 나에게 지금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나보다 먼저 배우자’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 입니다. 내가 먼저면 ‘이혼’이 따라오고, 하나님이 먼저면 ‘행복’이 따라옵니다. 

 
②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한 것입니다.
 
(잠2;17)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는 일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결혼할 때 누구의 이름으로 맹세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며, 이방인들도 결혼식만은 신(神)의 이름으로 합니다.  결혼서약은 본인의 다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사람들은 결혼을 ‘컨비니언스’(=편의)로 봅니다. 편의점(便宜店)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편하게 만나고 편하게 헤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사회는 신용사회입니다. 

Credit Card. 미국사람들은 집값의 20~30%만 (1억짜리 집을 2000만원만) 있으면 집을 삽니다. 그리고는 평생을 은행에 돈을 냅니다. 이것이 신용입니다. 2,3번만 못 내면 차압 들어옵니다. 바로 신용불량이 되고, 사회생활 끝이기 때문에 죽을 뚱 살 뚱 은행 납입을 신경 씁니다. 그러면 여러분, 결혼 약속은 집 한 채보다 못한가요?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결혼서약이 아파트 싸인 계약보다 못합니다. 그러니 불행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옛날에도 사람들은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 사유가 뻔 했습니다. 바람피워서, 학대해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요즘은 다릅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격차이, 또 좀 더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양육권 때문에 싸웠던 것도 옛날이야기입니다. 서로 아이들 안 맡으려고 싸웁니다.  좀 더 행복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없어야 합니다.  내 편의(便宜), 내 행복(幸福)에 아이들이 방해됩니다. 황수관박사님 이야기. 6.25때 폭탄 꽝. 아빠는 벌떡 일어나 다다다. 10미터쯤 가더니 뒤돌아보면서 ‘빨리와’ 합니다. 엄마는 3아이 눞히고 그 위에 자기 몸을 덮었습니다. 모성애는 다르구나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랑이 모성애입니다. 

지금은 이혼할 때 자기의 행복추구권 때문에 모성애 보기 어렵습니다.  예전처럼 살려고 애를 쓰다가.. 참다 참다가... 이렇게 사느니 이혼녀, 이혼남 소리를 듣더라도...가 아닙니다.  심지어 이혼이 하도 쉬워서 정부에서 법으로 ‘일정기간 상담 후 이혼하라.’ 는 명령을 여성단체에서 반대합니다. 행복추구권에 반대되고, 여성의 인권침해라고 합니다.  빠른 이혼이 행복이고,  빠른 이혼이 여성의 인권이라는 말입니다.   

결혼의 30~40%가 이혼이고, 이혼의 50%가 결혼 3년 안에 합니다.  준비 안 된 결혼이요, 안해야 될 결혼이었다는 말입니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자기를 버리고 간 엄마, 아빠를 안 그립니다. 그려도 괴물로 그린다고 합니다.  결혼이 신용불량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이라는 것을 알고서 지키려 한다면 이렇게 많은 버림받는 자녀들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③ 결혼은 돕는 배필입니다. 바라는 배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지으신 후에 그를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어 두 사람을 결혼시키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 아내는 남편을 돕기 위해 결혼하고, 남편은 아내의 도움을 받기위해 결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벧전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이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누가 더 많이 도와야 할까요? 남편이 아내를 도울 것이 더 많습니다.  결혼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서로를 돕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연약한 점,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한 것, 연약한 문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내의 연약한 점을 돕기 위해 결혼했다. 나는 남편의 부족한 점을 돕기 위해 결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하고 이혼에 이르게 되는 이유가 ‘바라는 배필’ 이라는 결혼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배필’이 뭐 잘못이냐, 바라지 않으면 왜 결혼하느냐 할 수 있겠지요?  바란다는 것은 이기적(利己的)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나를 위해서 당신이 손해를 보고, 나를 위해서 당신이  희생을 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바라는 대로만 하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행복은 나만 바라고, 내 것만 채우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돕는데서 옵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말씀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④ 창조적인 삶을 사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게 하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그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이 어떤 곳인지, 새로 부부가 된 남녀가 어떤 일을 목표로 하여야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부부는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돈을 같이 벌기 위해서, 자녀를 생산하기 위해서 결혼을 할까요?

그것이 결혼의 이유일까요? 물론 집도 필요하고, 여유있는 생활도 좋은 것이고, 자녀도 낳아서 길러야 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남녀가 결혼하는 이유라면... 동물의 왕국에서 나오는 짐승들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고단하고 궁핍합니다.  

부부는 창조적인 일을 하려는 목적으로 서로 돕기 위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가정이 아니라, 사회와 나라에 창조적이고 의미있는 일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세상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니면 오히려 불행을 불러옵니다.  

결혼에 대한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고, 고민하셔서, 바르고 행복한 결혼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준비된 결혼으로, 준비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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