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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가슴 병에 담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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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변에서 보내온 김명혁 목사 특별기고 
 
-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장). 

부활절 새벽부터 흐르기 시작한 뜨거운 눈물이 지난 며칠 동안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덕양기독교연합회가 주관한 부활절 새벽예배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의 마음 속에는 부활에 대한 감격보다는 일종의 혼란과 무거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강대에 오른 순간 내가 앉을 의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단한 기도를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순간 뜨거운 눈물이 눈과 가슴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 위해 죽으시고 나 위해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었다. 

사실 나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감격에 복받쳐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특히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배신자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전했을 때 나의 가슴은 황송함의 감격으로 떨고 있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사실 지난 며칠 동안 이 질문을 상기할 때마다 나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덕양에서 부활절 새벽예배를 마친 후 우리 부부는 잠시 쉰 다음 강변교회로 달려갔다. 은퇴 후 10주 만에 강변교회로 달려간 것이었다. 1층 식당에서 만난 권사님과 집사님이 나를 만나자마자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나도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보고픔과 반가움과 사랑의 눈물이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보고픔과 반가움과 사랑의 눈물은 예배 전에도 예배 중에도 예배 후에도 이어졌고 반가움의 포옹은 수없이 많이 이어졌다. 

본래 눈물이 많은 이용환 집사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본래 눈물이 적은 강영희 집사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30여 년 동안 미운 정 고운정 다 들었는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반가워했고 달려들어 나에게 안기기도 했다. 행복한 하루였다. 보고픔과 반가움과 사랑의 눈물을 흘린 행복한 하루였다. 

나는 지금 중국 연변에 와서 또 다른 종류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그 눈물을 나의 가슴 병에 담고 있다. 가난과 고난의 슬픔과 아픔 중에서 자라가는 불쌍한 우리 조선족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저들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느끼면서 슬픔과 아픔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의 집사람은 나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월요일 1시경 연길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이현정 목사 부부와 함께 연길사범대학 근처에 있는 어느 식당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돕고 있는 사범대학교 학생들 20여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학장, 교무처장 그리고 교수 몇 분들이 함께 기다리다가 우리들을 모두 반갑게 맞다 주었다. 푸짐한 식사 대접을 하면서 결연금과 긴급지원금을 전달했다. 몇몇 학생들이 자리에서 얼어나서 어려움에 처한 자신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편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꿋꿋하고 성실하게 자라서 민족의 일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우리 일행은 호텔에 들러 여장을 풀지도 못하고 그 길로 즉시 왕청으로 달려갔다. 소형버스로 2시간 달려서 왕청에 도착했다. 이번에 긴급 지원하게 된 네 가정을 일일이 찾아 보기 위해서였다. 네 가정이 모두 너무너무 불쌍했다. 엄마 아빠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는 8살 난 정권일이는 10리 되는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니는데 학교에서는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반찬도 없는 밥을 정신 없이 먹어치우는 손자를 바라볼 때마다 할머니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린다고 말했다. 8살 난 이봉림은 간염으로 고생하는 엄마와 함께 둘이서 살고 있는데 엄마는 병원에도 한번 가보지 못하고 오직 어린 딸에게 모든 소망을 두고 하루하루 아픈 몸으로 품팔이를 하면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집사람은 봉림이 엄마와 헤어질 때 둘이 한동안 부둥켜 안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북한 출신 엄마가 2살 때 집을 나가서 아빠와 함께 둘이서 살고 있는 동호철이도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슬픔 중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가슴에 슬픔과 아픔의 눈물을 지니고 연길로 돌아와서 된장찌개 하나로 간단한 저녁식사를 한 후 연길 라경호텔에서 여장을 푼 후 하룻밤을 너무 편하게 잤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화요일 아침 식사를 한 후 우리 일행 9명은(이영숙 회장을 비롯한 한길자, 김덕자, 김순한 등 마음과 뜻이 통하는 일행이었다) 2시간 거리에 있는 화룡으로 달려갔다. 결연가정과 긴급지원 가중 8가정을 일일이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한 가정 한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또다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대부부의 홀엄마, 홀아빠는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홀 엄마와 함께 사는 초등학교 1학년 박성 어린이는 예쁘고 착하게 생겼는데 너무 가난하고 불쌍했다. 탈북여성 엄마가 어디론가 도망가서(아마 체포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홀아빠와 함께 사는 초등학교 1학년 이화 어린이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울면서 엄마에게 편지를 쓰곤 한다고 했다. 

가장 슬픈 이야기는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눈물과 사랑으로 쓰다듬으면서 착하고 예쁘게 살아가고 있는 중학생 라혜연이의 이야기이다. 엄마 림계향은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뇌출혈로 쓸어져서 식물인간이 되었다. 슬픔과 아픔과 절망 중에서도 라혜연이는 학교에서는 최 우등생으로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고 있었다. 혜연이와 엄마는 “이정자 복리원” 원장의 특별 배려로 복리원의 작은 방 하나를 얻어 그곳에서 둘이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식물인간이 된 혜연이 엄마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엄마는 약간의 반응을 나타내며 눈물을 조금 흘리기도 했다. 

점심에는 화룡지역의 학생들 20여명을 비롯한 지역주민 40여명을 초청하여 푸짐한 식사를 대접했다. 박성, 이화 어린이와 혜연이가 나란히 앉아서 식사를 했는데 예쁘고 불쌍해서 안아주고 안아주고 또 안아 주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가슴 병에 담으면서 그 자리에서 혜연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예쁘게 또박또박 쓴 글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제 고마운 분들의 후원을 받게 될 팔가자 중학교 3학년 5반에 다니고 있는 라혜연입니다. 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 현실 앞에서 멍해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분들도 있구나! 한 학생도 아니고 이 숱한 빈곤 학생들에게 후원의 손길을 뻗치신다는 생각에 저는 떨리고 긴장된 마음을 가라 앉히고 고마운 분들에 대한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달하기 위해서 연필을 들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빈부 차이가 있듯이 우리 여기 자그마한 고장에도 빈부 차이는 영원히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나마 빈곤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그마한 빛을 볼 수 있었던 건 바로 당신들의 따스한 마음 때문입니다. 고마운 분들이여! 정녕 당신들은 날개 잃은 천사와도 비길 바가 아니며 당신들의 따스한 매 손길 하나하나가 얼마나 친근하며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오늘의 벅차고 감동된 심정을 안고 꼭 우리들이 훌륭히 성장하여 나라의 유용한 인재로 되는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바르고 훌륭히 성장하여 열심히 학습에 힘써서 고마운 분들의 크나큰 은정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답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착하고 예쁜 마음의 글을 대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슬프고도 아픈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그 눈물을 나의 가슴 병에 담는다. 나는 라혜연이와 엄마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밤이 깊었다. 한국시간으로 화요일 밤 11시 55분 이곳 시간으로 10시 55분이다. 내일 수요일 아침에는 안도와 용정으로 달려간다. (엄마들이 북으로 잡혀간) 금화와 선화도 반갑게 만날 것이다. 모레 목요일에는 도문으로 글피 금요일에는 훈춘으로 달려갈 것이다. 새 집에서 살게 된 (엄마가 북으로 잡혀간) 홍실이도 반갑게 만날 것이고 농장일로 열심히 뛰고 있는 오금숙씨도 반갑게 만날 것이다. 

부족한 나에게 달려갈 곳을 주신 주님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주신 주님께 눈물겨운 감사를 드린다. 나로 하여금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시는 강변의 성도들과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후원교회 성도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이번에 결연가정 127가정 긴급지원 가정 50가정을 돕는다. 그리고 매년 자활가정 60가정을 후원한다). 나는 다음 월요일 귀국 후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엔 오산기지교회로 주일엔 경주 동부교회로 달려갈 것이다. 

-3월 25일 화요일 늦은 밤에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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