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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의 윌버포스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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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나라의 일꾼을 뽑는 총선이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가? 아마도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할지 생각하는 것조차 관심 밖일지 모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선거가 자칫하면 50% 초반의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개신교사를 보면 교회가 부흥했던 시기는 기독교가 대사회적인 책임을 다했을 때였다. 20세기 초 행실이 좋지 못한 관리들은 자신이 부임하는 마을에는 기독교인들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떤 관리들은 기독교인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임지를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1899년 3월1일자 대한그리스도회보에 의하면 새로 원님으로 임명을 받은 한 관리는 자신의 부정이 탄로날까봐 "나는 야소교가 있는 고을에 가기 싫소. 야소교가 없는 마을로 보내주시오"라며 자신을 임명해준 관청에 요구했다. 이처럼 당시 교인들은 불의한 것에 대해서는 자기희생을 무릅쓰는 시위를 하였고, 상소를 올려서라도 굽은 것은 펴는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선거는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중한 기회다. 흔히 정교분리를 오해해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터부시하거나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정치'라는 말만 들어도 존 스토트의 말처럼 '마음속에서 빨간 경고등'을 켜는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政治)의 본래 뜻이 굽은 것을 펴고, 어그러진 것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정의가 강물처럼 우리 사회에 넘치게 하는 것은 신앙적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리스도인이 바른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거룩한 자이지만,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받은 사람들이다. 저명한 신학자인 알렉 비들러는 신자의 이러한 이중적인 정체성을 '거룩한 세속성'이라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이를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세상에 스며드는 소금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목적은 권력이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통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기독교적 가치를 보편화하는 데 있다. 이를 정치적으로 실천한 인물이 19세기 영국의 정치가였던 윌리엄 윌버포스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모두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다는 성경적인 가치관에 따라 노예제도는 폐지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이 영국 국가 수입의 3분의 1을 차지했던 당시에 노예제도 폐지 주장은 영국경제를 몰락시키려는 어리석은 몽상가의 생각으로 치부됐다. 그는 온갖 생명의 위협과 인신공격 속에서도 150회에 달하는 국회 연설을 통해 마침내 노예 폐지를 이뤄냈다.

윌버포스의 생각을 사로잡았던 것은 세상적인 부와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였다. 1787년 10월28일, 28세의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두 가지 목표를 주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 사회의 악습을 개혁하는 일이다."

4월9일 총선을 앞두고 한국의 윌버포스들이 국회의사당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옷 입고 사자후를 토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혈연을 넘고 지역을 넘어 엄중한 눈과 뜨거운 가슴으로 시대의 인물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이번 총선이 우리 믿는 자들의 선한 이 마음껏 발휘되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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