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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찬양의 원리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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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38-239) 찬양의 원리 (시편 149편 1-9절)


1.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십시오

 본문 1절에서 ‘여호와께 노래하며’라는 표현을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예배를 드릴 때마다 누구 앞에 있는가를 잊지 마십시오. 예배할 때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예배 자리에 와 있습니까? 자신을 위한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예배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자신이 은혜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 순서가 분명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찬양입니다. 흔히 예배할 때 설교를 제일 중시합니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남긴 아름다운 유산 중의 하나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변화 받고 치유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중요성을 자기 본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즉 말씀을 자신이 은혜받기 위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매우 귀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기도가 자신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격해하는 기도는 적은 편입니다. 그처럼 말씀을 사모하는 이유도 자기중심적이기 쉽고 기도하는 이유도 자기중심적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에서는 기도와 말씀보다 찬양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2. 새 노래로 모여 찬양하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이 구절에서 ‘새 노래로’란 말은 ‘새로운 가사로’ 혹은 새로 지은 노래’로란 말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4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구절을 보면 ‘새 노래’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르는 찬양을 뜻합니다. 옛 사람이 아닌 새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또한 ‘새 노래’란 ‘새 희망을 담아 새로운 감동과 기쁨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 새 희망과 감동과 기쁨을 가지고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즐거워하십시오(2절). 찬양을 가장 찬양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두운 밤과 힘든 현실 중에도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겁고 기쁘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낮의 노래’보다 ‘밤중의 노래’를 더욱 기뻐하십니다.

 나이팅게일은 밤에 노래하는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낮에는 다른 새들도 노래하니까 그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지만 밤에 홀로 노래할 때 그 소리가 청아하고 생생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절망의 밤에도 노래하는 나이팅게일 성도가 되십시오. 밤중의 노래는 하나님의 귀에 더욱 생생하게 들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극한 슬픔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음소리를 신앙고백으로 만들고 한탄을 찬탄으로 만드십시오.

3. 악기를 동원해 찬양하십시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동양 문화에서는 예배를 드릴 때 춤추면서 소고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면서 숨을 못 쉴 정도로 경직된 상태에서 예배드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할 때는 손뼉치고 춤추면서 역동적으로 드리는 찬양이 오히려 더 성경적인 찬양에 가깝습니다.

 기쁠 때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입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너무 감격이 넘치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사람이 기쁠 땐 뛰게 되어있고 손을 흔들고 춤을 추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기쁨을 억지로 거부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거부하는 그 모습을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개를 키우는 재미가 어디 있습니까? 개가 주인이 자기에게 꼬리를 흔들면서 좋아서 펄펄 뛰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집에 들어가도 개처럼 반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손 하나 흔들지 않을 때 개는 정성을 다해서 꼬리를 흔들고 좋아서 뛰니까 얼마나 흐뭇합니까? 하나님도 똑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같은 찬송을 불러도 인상 쓰며 억지로 찬송하는 사람보다 좋아서 온몸을 동원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4. 겸손한 마음으로 찬양하십시오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성도들은 영광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겸손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외적으로 드러난 찬양행위들이 자신의 믿음과 영성을 과시하기 위한 표시가 되면 그것은 참된 찬양이 아닙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최대로 높이는 참된 찬양을 드리려면 지극히 겸손해져야 합니다. 교만한 자의 찬양은 참된 찬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몸짓을 동원한 찬양이 너무 형식화되고 습관화되어서 찬송을 하면 무조건 손부터 올리고 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제일 은혜 받은 자요!”라는 과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보기 싫습니다. 몸짓 찬양이 자기 혼자 은혜는 다 받은 것처럼 과시하는 교만한 모습의 표출로 느껴지게 하면 안 됩니다. 찬송의 전주만 들려도 손을 번쩍 들고 벌떡 일어서는 모습이 습관이 되면 방정맞게 보일 수 있습니다. 밸런스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경망스럽다고 여기면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너무 액션이 지나치면 정성의 부족이나 감정적인 흥분처럼 보일 수 있기에 그 균형을 이루도록 찬양 인도자도 사려가 깊어야 합니다. 찬양할 때마다 무조건 손뼉을 치라고 하거나 무조건 손을 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아멘 훈련이 잘된 것은 좋지만 무조건 습관적으로 아멘을 하고 말도 안 되는 얘기에도 아멘을 하면 좋지 않습니다. 사람이 듣기 싫은데 하나님이 듣기 좋아하실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습관적으로 아멘을 하면 은혜가 충만한 것 같지만 방정이 충만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어떤 부흥회에서는 부흥사가 “음!” 하고 헛기침을 해도 “아멘!”을 합니다. 그렇게 아멘이 버릇처럼 되니까 성의가 없는 아멘이 됩니다.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찬양을 할 때 춤추고 두 손을 들고 박수치는 것도 아름답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어 박수나 춤이나 찬양만 했다 하면 나오는 식의 반응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도 교만의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찬양할 때는 겸손함이 영혼과 마음의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5. 공의대로 행하며 찬양하십시오

 본문 6-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입술로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손으로는 공의를 따라 행해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성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에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도 중요한 찬양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이 생생한 만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식도 생생하게 하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행함이 없는 찬양은 죽은 찬양입니다. 성숙과 미성숙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서 생깁니까? 행함에서 생깁니다. 행함과 실천이 따르지 않는 말과 찬양은 미성숙의 표시입니다. 진리를 입으로만 말하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듯이 찬양을 무대 위의 찬양으로만 끝내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행함과 실천이 수반된 진실한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면 하나님은 좋은 것을 가만히 움켜쥐고 계시지 않고 마음의 소원을 아시고 다 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풍성하신 하나님입니다. 예배에 나올 때 소원을 주 앞에 다 드리지 못해도 찬양만이라도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지 아니한 것도 주시고 은혜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극심한 고난과 시련 중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시한부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날 때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는 것만큼 고통스럽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십시오. 그 순간을 절망을 넘어선 희망의 순간으로 만들고 슬픔을 끝내고 기쁨을 출발시키는 순간으로 만드십시오. 그때부터 진짜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여기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는 죽음이 곧 삶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상처가 곧 상급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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