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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연리지 사랑, 연리목 사랑, 연리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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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우 목사 (마드리드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피터 톰킨스의 책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도 바흐의 부드러운 음악을 좋아하지만 시끄러운 록음악은 싫어한다”고 했다. 노산 이은상 선생도 “나무의 마음”이란 시에서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있소”라고 나무의 감성을 노래했다. 이런 속성 때문에 사람들은 “연리지”(連理枝)를 연인의 사랑에, “연리목”(連理木)을 부부의 사랑에 비유하곤 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가장 숭고한 부모의 사랑은 두 나무의 뿌리가 서로 결합된 “연리근”(連理根)에 견줄 만하다. 


순수한 남녀의 사랑, 연리지(連理枝) 사랑

나무는 좁은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서로 부딪치고 맞닿기 마련이다. 서로 다른 가지들이 서로 아옹다옹하고 있을 때 햇빛과 바람은 가지들이 서로 맞닿도록 등을 떠민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가지들이 인연을 맺어 “연리지”(서로 다른 나무가지가 연결되어 자라는 현상)가 된다. 남녀의 만남도 이런 연리지와 같은 경우가 허다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의 등을 떠밀어 이삭과 리브가를 기꺼이 만나게 해 주었다. 서로 다른 두 나무가지가 만나 연리지가 되듯 이삭과 리브가 또한 서로 얼굴을 마주 보거니 말거니, 손을 잡거니 말거니 반복하는 가운데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어 훌륭한 가정을 이루었다.

유감스럽게, 이제 이삭과 리브가와 같은 순수한 남녀의 사랑은 먼 옛날 애기처럼 들리고 있다. 20세기 대표적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와 프랑스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보부아르, 두 사람은 계약결혼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이들은 “연애 기간을 몇 년마다 갱신하되,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지 말자”라는 계약을 맺고 51년간 결혼생활을 하면서 숱한 다른 연인을 두기도 했다. 

요즘 유럽인들이 갖고 있는 자유분방한 결혼과 연애 관은 이들의 계약결혼과 무관치 않다. 한국 또한 몇 년 전 절찬리에 방영된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가 보여주듯 “혼전 동거”는 안방까지 침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예전에 어머니들은 시집가는 딸에게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라”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와 달리 요즘 어머니들은 “애부터 덜컥 낳지 말고 좀 살아 보고 애를 낳거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동거나 이혼도 별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의 연리현상은 아무 가지가 서로 맞닿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종(種)의 나무라야만 가능하다. 소나무와 참나무처럼 종류가 전혀 다른 나무는 수십 년간 붙어 있어도 결합되지 않는다. 세포배열이 서로 달라 영양분 교환은 고사하고 맞닿을 때마다 서로에게 상처만 준다. 소나무와 참나무 가지의 만남처럼 유부남과 유부녀의 만남, 신앙이 서로 다른 남녀의 만남은 김건모의 노래 제목처럼 “잘못된 만남”일 뿐이다.


부부일체(夫婦一体)의 사랑, 연리목(連理木) 사랑

내가 23년, 16년 전쯤에 구입했던 나무들이 금년에도 나에게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곳 마드리드에 이사왔을 때도 벤자민 몇 그루를 샀다. 처음 세 나무였는데, 한 화분에서 10년쯤 지나는 동안 몸체가 서로 엉켜 지금은 한 나무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저들끼리 스킨십이 이루어지면서 물리적 접촉 단계를 지나 생물학적으로 완벽하게 결합되어 수분과 영양도 함께 나누는 한 나무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하나로 합쳐진 것을 “연리목”이라 한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연리목을 “두 사람이 한 몸이 된 부부”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다하여 부부의 애틋한 사랑에 비유해 왔다. 실제로 연리목은 비록 두 나무 중 하나가 죽는다고 해도 다른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끝까지 함께 생존하고 있다. 참으로 연리목은 “검은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란 뜻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한 때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된 책 중에 하나로 “개방적인 결혼생활과 바람직한 이혼생활”이 뽑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 같은 책을 구입해서 읽을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결혼생활에 중대한 위기를 맞은 사람이 많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요즘 유럽목사의 결혼 주례사를 보아도 “부부 일심동체니…”하는 말을 찾아보기 어렵다. 부부의 인식도 무조건 종속 관계가 아닌 각자 독립된 영역을 가지고 필요한 부분만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바뀌었다. 이미 유럽은 프랑스 혁명을 가져왔던 루이 16세의 아내인, 마리 앙트와네트와 스웨덴의 귀족 페르젠처럼 “부부일체”(夫婦一體)보다 처음부터 서로 독립된 “부부이체”(夫婦異體)임을 전제하고 대부분 살아가고 있다. 부부라면 누구나 시인 워즈워즈가 “아름답지 않으면서 매일의 양식이 되는 아내”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다시 한번 깊이 새겨볼 만하다.


연어 같은 어머니의 연리근(連理根) 사랑

한국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종종“하늘 같이 높고 바다 같이 깊다”라고 추상적으로 표현하지만, 에스키모인들은 “펭귄 같은 아버지, 연어 같은 어머니”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연어는 냇물 상류에 태어나 바다에 살다가, 다시 고향, 모천으로 돌아와서 일생을 마치는 회유어족이다. 바다에 사는 연어는 알을 낳기 위해 모천으로 돌아오는데, 하루 14Km이상 급류나 심지어 폭포도 거슬러 올라간다. 먹지도, 쉬지도 않고 줄곧 모천으로 직행하면 체중은 4-5Kg으로 절반으로 줄어든다. 겨우 모천으로 돌아온 연어는 맑은 자갈돌이 보이는 깨끗한 물에서 산란한 후, 알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그토록 연어를 좋아하는 에스키모인들도 산란기에만큼은 연어를 먹지 않는데, 이는 새끼에 대한 지극한 어미의 본성적 사랑에 감동한 탓 때문이라고 한다. 

“연리근”이란 서로 다른 나무뿌리가 땅속에서 서로 결합된 것을 말한다. 베어버린 나무나 섞은 나무가 몇 년이 지나도록 죽지 않고 다시 줄기가 돋아나는 것도 바로 나무뿌리들이 서로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자녀의 뿌리는 부모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 탯줄이 끊겨졌다고 해서 어머니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분리된다해도 본성적으로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1929년 독일의 토마스만이 “부텐브로크가의 사람들”이란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책 가운데 임신 중에 있는 독일 어머니들이 뱃속의 아이를 위해 바로크 음악을 듣는 대목이 나온다. 음악을 듣고 자란 태아가 심성이 곱고, 믿음이 깊어진다는 이유 때문이다. 지금도 유럽의 임산부들은 낙천적인 아이를 키우고 싶으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신중한 아이를 키우고 싶으면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나무에 새긴 사랑, 십자가(十字架)의 사랑

사랑은 동서고금의 종교와 역사, 모든 인간사에서 한 치도 비켜갈 수 없는 주제였고, 인간의 모든 삶 속에 빼곡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연리지와 연리목 같은 연인과 부부의 사랑도, 심지어 무엇과 견줄 수 없는 연리근 같은 부모의 사랑마저 한계가 있다. 20세기의 최고 지성이라 불리는 영국의 작가 루이스(Clive Staples Lewis)가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톨게에 의해 양육되고, 필레아에 의해 성장하고, 그리고 아가페에 의해 완성된다.”라고 한 것처럼 인간이 가진 사랑은 역시 미완성일 뿐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홍수 가운데 더욱 갈증을 느끼듯, 범람하는 사랑의 홍수 가운데 사랑의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사랑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 어디에 가도 찾을 수 없는 사랑이 여기에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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