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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위정자를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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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현 목사 (사랑의교회) 

한국 교회는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될 때부터 애국애족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1895년의 북장로교 선교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한국 교회가 지닌 흥미 있는 양상의 하나는 애국심이다. 국기가 대나무 끝에서 기독교인들의 집이나 교회 위에 휘날리고 있었다. 주일날이면 그들의 집이나 교회 위에 국기를 단다는 것은 선교사들의 아무런 지시도 없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실천이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국기를 단 것은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의 소리 없는 웅변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오늘날의 개인주의에 젖은 눈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intercession)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오늘날 이 말씀처럼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소외당하는 구절이 또 있을까? '선거에서 자신의 뜻과 다르게 당선된 것만 해도 보기 싫은데, 오히려 그런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니. 그것도 적당히 하는 기도가 아니라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라는 4중적 강조로 기도하라는 것은 아무리 성경 말씀이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이 말씀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일 수 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임금은 기독교인들을 콜로세움에서 수치와 조롱거리로, 굶주린 사자의 밥으로 삼고, 심지어 시체를 길거리를 밝히는 기름덩이로 삼았다는 네로였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마귀의 화신과 같은 악명 높은 네로를 위해 오히려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이토록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바울의 이러한 권면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는 이어지는 말씀에 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임금이나 위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가 평안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위정자가 제대로 정치를 하는 것이 선순환적인 순서임을 아시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기도 때문에 나라가 평안하고, 나라가 평안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평안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선순환적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믿는 자들은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서, 특히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국민의 선택을 받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요, 우리의 기도 때문에 이 나라가 보호받는다면 그것은 기도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기독교인들은 위정자들을 조롱거리로 삼는 일에는 동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R A 토레이 예수원 원장은 국가 위정자들을 농담거리로 삼는 것은 적어도 성경적인 입장에선 죄라고 말씀한 바 있다. 자신이 원했든 아니든 간에 선택이 되었으면 마음을 열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기도의 깊이와 넓이이며, 나아가 우리가 축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품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다. 특별히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우리의 기도의 진폭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만큼 우리의 삶의 지경도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의 눈물이 흐르는 방향대로 국가의 미래가 결정될 것임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길 수 있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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