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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산 사람 죽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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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달익 목사 (서문교회)

앤서니 드 멜로의 책 '종교 박람회'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도의 어느 철학가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도무지 정리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 까닭이다. 모름지기 철학자란 일반인이 알 수 없는 것을 알거나 정리하지 못하는 난감한 문제들을 명쾌한 논리로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를 이토록 난감하게 만든 문제는 삶과 죽음의 차이였다. 삶과 죽음의 차이를 한 마디 문장으로 명확하게 설명해야 하는데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종일 낑낑대는 그에게 늙은 아내가 거들었다. "그래 산 것과 죽은 것의 차이를 모른단 말이오? 산 것은 만져보면 따뜻하고 부드럽고, 죽은 것을 만져보면 싸늘하고 빳빳하지요"라고 했다. 기가 막힌 설명이었다. 그는 즉시 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여러 마을을 지나 눈덮인 히말라야를 넘게 되었는데 몸씨 춥고 눈보라가 심한 날이었다. 추위 속을 한동안 걷던 그가 볼을 만져보았다. 싸늘했다. 손을 만졌더니 빳빳했다. '이제 나는 죽은 사람이구나'라고 판단한 그는 길가에 드러누웠다. 뒤따라 오던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죽은 이를 묻어주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공동묘지가 있는 방향을 몰라 설왕설래 언성만 높았다. 견디다 못한 철학자는 벌떡 일어나 "내가 죽은 사람이 말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한 마디만 하겠는데 공동묘지는 오른쪽에 있소"라고 말하고는 도로 벌렁 드러누웠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이 이야기는 여러 해석을 가능케 한다. 멀쩡하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 희극인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흔히 우리는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라는 확신을 지닌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영이 내 안에 계시고 나 역시 그분 안에 있음을 믿는다. 분명 산 사람이며 죽어도 다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온갖 탐욕과 세상에 대한 집착과 자기 과시에 혈안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내용대로 결코 살지 않는다. 여기에 우리의 비극이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희화화되는 현실의 원인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지닌 사람다운 거룩한 자존감으로 산다. 세상이 탐이 나서 죽은 사람 흉내를 내고 산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왜 이렇게 미약하고 산 사람다운 영적 패기가 없는 것일까? 마틴 부버는 그 원인을 '우리가 3인칭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2인칭의 하나님에 대해선 낯설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말은 많았어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교제하는 일이 너무 소홀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하나님 그분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 서서 그 생명의 능력을 깊이 얻어야 한다. 그래야 믿고 고백하는 바대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되고 진지하고 절실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마치 이상한 사람처럼 취급받는 것은 우리의 고백과 주장의 내용이 이상해서가 아니다. 주장하는 바대로 살아갈 의지가 아예 보이지 않거나 주장하는 바를 삶의 원칙으로 삼는 일도 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늘 세상의 흉내만 내는 우리에게 누가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며 감동된 영혼으로 찾아와 사랑의 교제를 요청할 것인가? 살아 있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고백하는 바 그 내용처럼 살기 위해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잃어선 안된다. 우리는 산 사람이다. 결코 죽은 사람 흉내내듯 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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