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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토요편지] 내 짝꿍 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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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환 (동화작가) 

원표는 우리 집보다 더 높은 산동네에 살았다. 나와 함께 학교에 가기 위해 원표는 매일 아침 우리 집에 들렀다. 월말고사가 있던 날이었다. 원표가 입김을 뱉으며 우리 집으로 왔다.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는지 원표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원표와 나는 떼꾼한 눈을 비비며 학교로 갔다. 책상 위에 책가방을 올려놓고 시험을 봤다. 마지막 시험은 산수였다. 

시험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나서 선생님이 말했다. 
“선생님이 할 일이 많아서 그러는데 산수 시험지는 너희들이 채점을 했으면 좋겠다. 가방 내리고 짝꿍끼리 시험지를 바꿔서 채점을 하는 거야. 알았지?” 

나는 짝꿍인 원표와 시험지를 바꿨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대로 채점을 했다. 나는 100점을 받았고, 원표는 두 문제 틀려 92점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원표는 땅만 보고 걸으며 울었다. 
“원표야, 왜 울어? 울지 마, 원표야….” 원표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집 앞까지 왔지만, 우는 원표를 두고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원표를 따라 산동네 언덕을 올라갔다. 원표네 집은 대문도 없이 휘우듬하게 기울어진 판잣집이었다. 방문을 열자 원표 여동생이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방 안에서 틉틉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원표 여동생은 우리들 앞으로 밥상을 가져 왔다. 밥상에는 찌그러진 찌개냄비 하나와 총각김치가 달랑 놓여 있었다. 겨울인데도 원표네 방바닥은 얼음장 같았다. 
“내 동생은 심장병이 있어. 그래서 밖에도 잘 못 나가….” 원표 목소리에 눈물이 어려 있었다. 

우리는 말 없이 밥을 먹었다. 무심히 올려다 본 앉은뱅이책상 위에 원표의 우등상장이 걸려 있었다. 신문지로 바른 벽지 위에서 원표의 우등상장은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원표의 우등상장을 나는 몇 번이고 바라보았다. 막노동 일을 다니는 원표 부모님에게 아들의 우등상장은 얼마나 큰 희망이었을까. 심장병을 앓고 있는 원표 여동생에게 오빠의 우등상장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었을까. 

날이 어두워진 뒤, 원표네 집에서 나왔다. 어둠 내린 골목길을 걸어 나오는데 별똥별 하나가 선을 그으며 떨어졌다. 순간 나는 뜨겁게 눈을 떴다. 나는 원표네 집으로 다시 달려갔다. 알전구 불빛이 반짝거리는 원표네 방을 향해 나는 소리쳤다. “원표야, 미안해… 원표야, 정말 미안해….” 나는 마음을 찢으며 달빛 쏟아지는 산동네를 내려왔다. 

그날 낮, 짝꿍끼리 산수 시험지를 바꿔서 채점할 때, 나는 원표가 쓴 정답 두 개를 몰래 고쳐 틀리게 채점했다. 원표가 100점 받는 게 싫었다. 원표는 내가 자신의 정답을 고친 걸 알고 있었다. 착한 원표는 내게 아무 말 못하고 울기만 했던 것이다. 원표는 나 때문에 월말고사에서 우등상장을 받지 못했다. 식구들에게 튀밥 같은 웃음을 주고팠을 원표의 작은 소망을 내가 빼앗아 버린 탓이었다. 신문지로 바른 벽지 위에 걸려, 춥고 어두운 원표네 방을 밝혀줄 등불 하나를 내가 훔쳐 버린 탓이었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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