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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최초의 교회당 건물

  • 최한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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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교회당 건물


 예수 그리스도 이후 곳곳에 복음이 전해지고 크리스찬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매주일 예배드리면서 공동기도, 설교, 침례와 성찬 등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주후 230년경까지 가정집에서 모여 예배하였다. 성도의 수가 많아졌지만 그 때까지 독립 건물로 된 교회당이 없이 가정집에서 모여 예배하였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보여준 전통이 그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모임이 3세기에 접어들면서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230년경부터 로마 제국의 국경인 듀라-유로포스 지역에서 성도들의 모임이 가정집에서 교회건물이라는 장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은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로마 제국의 국경 수비대가 있는 장소로 현제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지역이다. 듀라-유로포스 지역은 로마와 바사 간의 전쟁터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나라가 로마와 바사로 바뀌지는 악순환이 있었다. 1930년을 전후하여 이곳에 고고학 발굴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세워진 교회당은 현존하는 최초의 교회 건물이며 그 곳에서 초대교회의 벽화를 볼 수도 있다. 가정집의 벽을 헐어 예배장소로 사용했으며 동쪽 끝의 단은 설교자가 서있던 자리다. 다른 방은 침례를 행할 수 있는 침례장이 있으며 벽에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목자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듀라-유로포스의 교회는 예배 장소가 가정집에서 웅장한 교회당으로 변천하는 전환점이 되었음을 잘 알려준다.

 가정집에서 교회당으로 변하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성도들의 수가 많아지므로 더 이상 가정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다 참여할 수 있는 건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벽을 헐고 개조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함으로써 이제는 개인의 집이 아니라 교회당이라는 공동 모임 장소가 된 것이다. 
 둘째는 기독교 초기에는 심각한 박해로 말미암아 공개된 장소에서 예배가 불가능하였다. 특별히 로마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박해가 점점 사라지고 로마에서 먼 국경의 변두리는 그만큼 자유가 있었다. 그러므로 공개된 장소에서 예배드림이 가능하게 되므로 가정 집에서 교회당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셋째는 가정집은 예배드리는 장소와 성찬을 행하는 장소 그리고 떡을 나누는 교제의 장소가 같은 곳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와 성찬 그리고 교제의 장소가 분리될 필요성을 갖게 되므로 자연히 예배당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최한주 목사 <푸른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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