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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에 관해 좀 더 알아야 합니다

  • 인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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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구원에 관해 좀 더 알아야 합니다

 눅1:67~80

 2015.5.24

우리는 지난주에 세례요한의 출생과 관련하여 ‘엘리사벳에게 통큰 믿음을 배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첫째로, 엘리사벳이 어떻게 고령의 나이에 아들을 낳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크게 여기셨다는 것은 특별한 긍휼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엘리사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긍휼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크게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라는 것을 절감해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그런 예를 누구를 통해서 들었습니까?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무궁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애 3:19-23). 그렇습니다. 우리가 큰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새롭게 느끼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엘리사벳이 작명문제로 고민하던 중 어떤 결정을 내렸느냐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고 천사가 전해준 대로 이름을 요한이라고 할 때에 친족들의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그때에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친척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당시 그들이 가문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상황을 좇을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좇을 것인지를 가지고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에 엘리사벳처럼 상황을 좇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야 합니다. 말씀을 좇지 않고 상황을 좇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추락한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엘리사벳이 어떻게 친족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들을 낳은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은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아이를 낳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대로 아들을 낳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삶 속에서 자주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큐티를 하고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가랴의 예언’이라고 합니다. 사가랴의 예언은 한 마디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68절에는 속량하셨다, 69절에는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 71절에는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74절에는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았다, 77절에는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구원과 관련된 구절입니다. 구원은 신앙의 기초로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을 떠나서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에 관해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구원에 관하여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누구로부터’ 구원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7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누가는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마귀입니다. 왜 마귀가 우리와 원수지간입니까? 우리가 마귀의 종이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마귀를 우리의 대적이라고(벧전 5:8)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와 우리가 원수지간이므로 마귀의 공격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본질적으로 영적전쟁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엡 6:12). 그런데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마귀의 공격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퇴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할까요? 이간을 통해서입니다. 마귀는 먼저 하나님과 우리를 이간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공격을 받으면 믿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믿음이 있다가 갑자기 믿음이 떨어지는 것은 마귀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약해지면 마귀의 공격을 인지하고 영적전쟁에 돌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 방치하면 영적으로 치명타를 입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사이를 이간시킵니다.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공격을 받으면 하찮은 이로 가족관계에 다툼이 일어나고 교회에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마귀가 배후에서 공격하고 있음을 알고 마귀와 싸워서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장례식에 ‘D3왕의사역’으로 장년 중에 최초로 훈련을 받아 제자가 된 박미하 전도사가 다녀갔습니다. 여러 목회자들과 함께 식사하던 중 자신이 저에게 훈련 받고 변화된 삶을 간증하면서 영적전쟁에서 어떻게 이기게 되었는지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훈련을 받기 전, 항상 가족 간에 다투는 일로 갈등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행복한 가정 같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남편과 두 딸과 종종 다투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8확신의 세 번째 과의 제목이 ‘승리의 확신’인데, 마귀가 이간하기 때문에 가족관계에 갈등이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가족 간에 자주 다투게 되었던 이유가 마귀에게 졌기 때문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날 저녁 가족모임을 갖고 이렇게 선포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사랑하는 가족과 싸우지 말고 마귀와 싸우자.” 그 후로 가족 간에 다툼이 사라졌고 정말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간증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이번에 다시 들으면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렇게 가르치지만 여전히 마귀에게 속아서 사람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원수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믿음이 약해지고 가까운 사람사이에 분열이 일어날 때에 마귀가 공격하는 줄 알고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옆 사람에게 말합시다. “사람과 싸우지 말고 마귀와 싸워서 이깁시다.”


둘째로, 구원 받은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77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죄 사함을 받는 것이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즉 구원받았다는 것은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본질적으로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죄 사함이 결여된 구원은 기독교의 구원이 아닙니다. 따라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죄 사함의 확신이 없다면 이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을 받았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완벽하게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과거, 현재,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사함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아직도 이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또 다른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속에서 구원을 경험해야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즉 구원받은 것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죄 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종종 그것에 대해 의심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응답을 받았다고 합시다. 즉 삶속에서 구원을 경험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기도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77-78절을 보십시오.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았기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저와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을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작금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전통유대인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고 또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즉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면 자신들의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는 나오는 바리새인의 성전기도를 통하여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나기 전, 율법 준수에 목숨을 걸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선한 행실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남성이 여성복을 입는다고 여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흑인이 화장을 한다고 백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행실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선한 행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행실과 구원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미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요구하는 것을 이행하지 못했다거나 자신이 세워놓은 종교적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해도,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십일조를 내지 못해도 구원과는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에 보탤 것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어떤 과정을 거쳐 구원을 받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72-73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73절) 약속하신 것을 때가 이르매 이루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이처럼 오래전에 맹세한 것이 성취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물론 우리의 행위를 전제로 한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전제 조건이 없는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 가운데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과 오셔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때부터 약속하신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신 것을 깨닫고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 곧 성취될 것을 믿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서신을 보면 바울 자신도 살아생전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약속의 말씀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되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심이 무뎌있는 것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심을 갖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오시지 않았지만 곧 오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심판하십니다. 이 약속을 붙잡고 재림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구원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74-75절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그런데 이 본문을 다른 역서들은 다소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새 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 공동번역은 “우리를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시어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 한 평생을 거룩하고 올바르게 살게 하심이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NIV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to rescue us from the hand of our enemies, and to enable us to serve him without fear in holiness and righteousness before him all our days.” 살펴보았듯이 개역개정판을 제외한 대부분의 번역서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구원 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움이 없이 섬겨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구원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둘째는, 구원받은 자는 거룩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거룩하게 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세상에 살지만 그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세상 사람과 동일한 가치관으로 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보다 저 세상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구원은 죄와 마귀의 손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한행실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 아니라 크신 긍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선행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구원을 하시겠다는 약속은 옛 조상때부터 하셨는데 그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것과 심판하신다는 말씀도 이루어질 것을 믿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야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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