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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다

  • 인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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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다

눅2:1-20

2015.6.7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탄생하셨던 시대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때를 ‘가이사 아구스도’가 통치하고 있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는 ‘율리오 케사르’의 속명이었는데, 그의 조카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을 조직한 후부터 황제의 칭호가 되어 실제로는 ‘황제’의 동의어로 쓰였습니다. 성경에 언급되는 로마의 황제는 모두 ‘가이사’로 통칭되는데 4명의 가이사가 등장합니다. ‘아구스도’는 ‘아우구스투스’를 음역한 것으로 ‘존귀한 자’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온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구스도’가 호적하라고 명령한 것은 징병과 조세를 위해서 인구조사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명령에 거역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도 다윗의 후손이라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요셉이 누구와 함께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자는 당시 호적 조사에 임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요셉이 임신한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5-6절을 읽겠습니다.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위 구절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갈 때는 마리아가 언제 아이를 낳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요셉이 혼자가지 않고 임신한 마리아와 함께 한 것은 그녀가 혼자서 아이를 낳도록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배려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이전에도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가 임신했음을 알았을 때 마리아를 배려하여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양보하고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은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요셉이 가졌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욱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요셉이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갈 때에 마리아를 데리고 간 것은 단지 그의 배려심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미가서 5장 2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1295p).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성경은 이미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요셉이 호적을 하러 갈 때에 임신한 마리아도 함께 올라간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독자이시고 모든 인생은 연기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구스도가 호적을 명령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세상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즉 모든 사건을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지 말고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모든 사건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사업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시다. 그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주변 경기가 좋지 않아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내부적으로 사업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보이는 것만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 모든 문제를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롬 1:17).


제가 병원 심방을 가면 의례적으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뜻하지 않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이 고난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혹자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이번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문제를 겉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통하여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이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유익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요즘 메르스로 온 나라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평택성모병원이 메르스의 진원지로 밝혀지자 평택시는 패닉에 빠졌습니다. 이번 메르스는 조금이나마 기지개를 키려는 한국경제에 치명타가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중국 관광객들의 잇단 예약 취소로 이에 관련된 업종은 큰 손실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메르스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메르스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요셉이 해산할 날이 다 된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에 올라가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5-7절을 보십시오.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온지 며칠 되지 않아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냥 아이라고 말하지 않고 ‘첫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를 낳으면 그냥 아들이나 딸이라고 합니다. ‘첫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명이 있을 때에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누가는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를 ‘첫아들’이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마리아는 예수님을 제외하고도 적어도 6명을 낳았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 13:55-56). 예수께서도 마리아가 낳은 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첫아들’이라고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면 큰일 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첫아들은 될 수 있어도 요셉의 첫아들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요셉과 마리아의 성적관계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낳은 첫 아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야고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첫아들’이라고 한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태어날 자 가운데서 ‘첫 번째’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맏형이 되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어디에 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구유에 뉘였습니다. 구유란 ‘짐승의 먹이통’입니다. 그런데 왜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아 짐승의 먹이통에 뉘였습니까? 성경은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7절). 즉 사람들이 많이 온 고로 숙소를 얻지 못해서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 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많아 있을 곳이 없어서 예수님을 마구간에 뉘이셨을까요?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만왕의 왕이십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그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뉘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 뉘이게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무슨 말씀입니까? 아기 예수께서 구유에 뉘이신 것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표적일까요? 구유에 누여있는 아이가 인간을 구원할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즉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거든 그가 메시야인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아기 예수가 메시아이신데 그를 말구유에 뉘이게 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세상의 구원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르듯이 하나님의 구원과 사람의 구원 방법은 다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시려면 예수님을 당시 최고 강대국의 왕궁에서 왕자로 태어나게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기예수를 짐승의 구유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방법과 이 세상의 구원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세상의 힘과 권력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힘이 있고 돈이 있는 사람을 통하여 해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무릎을 꿇고 엎드리어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4)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죄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삶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과 힘이 있는 자를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그 소식이 가장 먼저 누구에게 전해졌습니까? 구주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들은 자는 베들레헴에 있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먼저 메시아의 탄생 소식이 전달되지 않고 밤중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당시 목자는 가장 힘없고 가난한 자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당시 헤롯 왕이 중앙산지의 많은 곳을 계단식 경작지로 바꾸면서 목자들은 더 멀리 멀리 밀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광야에서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광야는 위험한 곳입니다. 더군다나 근동지방은 일교차가 심해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웠습니다. 또한 목자들은 남의 경작지에서 몰래 양들을 치는 강도 정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법정에서 증인으로도 설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동남아를 우선적으로 복음화하려고 합니까? 그들이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돈과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조그만 선물에도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듣고 거듭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초림시에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복음이 전파된 것처럼 재림시에도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의 상황이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 빠져서 홍수로 심판을 받기까지 깨닫지 못했지만 노아는 홍수심판을 대비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 소식을 가장 먼저 통지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8절-10절을 보십시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당시 목자들은 한 밤 중이었지만 잠을 자고 있지 않고 자기의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목자들은 그들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기가 맡은 일에 성실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을 부르셨습니까? 아무나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물을 깁고 있는 자들을 부르셨고, 세관에 앉아서 세무를 보고 있던 자를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재림의 때에 가장 먼저 소식을 접하기 이해서는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깨어있었습니다. 그들이 양을 지키고 있었던 시간은 한 밤 중이었습니다. 밤은 졸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밤중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재림시에 도적같이 오시지만 깨어있는 자들에게는 그렇게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전해준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15-17절을 보십시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그들은 구유에 구주께서 탄생하셨다는 말을 듣고서는 곧바로 아기를 먼저 찾아가서 확인하고 천사가 그들에게 전해준 말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말이 무엇입니까? 11절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들은 마구간에 태어난 아기가 ‘그리스도주’시라는 것을 확인하고서 가만히 있지를 않았습니다. 가서 확인하고 그 사실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는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구주이신 것을 알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좋은 음식을 먹어도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는데 하물며 구주를 만났으면서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은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제가 왜 제자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합니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훈련을 받아 평신도사역자가 되어야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말씀으로 제자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을 건물 안에서만 하면 안 됩니다. 현장에서 재생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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