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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은 성령으로 전해야 합니다.

  •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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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성령으로 전해야 합니다.

눅4:16-30

 2015. 9. 13

지난주에는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셨듯이, 우리도 가르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어떻게 사셨습니까?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삶을 사셨습니까?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주님의 마지막 명령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이 되자 자라나신 곳인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당시 회당제도에 대하여 성경이 자세히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지만, 유대전통을 통해서 회당운영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얻을 수 있습니다.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고, 13세가 되면 회당에 출석해야 합니다. 회당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개인 기도를 하고, 다음에는 쉐마인 신명기 6장 4-9절과 11장 13-21절을 고백하고, 회당예배의 공식 기도문인 ‘18개의 축도문’을 낭송합니다. 그 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하게 되는데, 보통 모세오경이 중심이 된 성구집(lectionary)을 읽습니다. 그리고 나서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설교는 할 사람이 없으면 생략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 15절을 보면 회당장이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께서 회당의 절차에 따라 설교하시기 전 성경을 읽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읽으신 말씀은 이사야 61장 1,2절 이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먼저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왜 성령께서 자신에게 임하셨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장차 성령께서 오시면 그가 자신을 증거하실 것이라고(요 15:26) 말씀하셨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구하는 동기와 목적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성령사역을 은사사역과 치유사역으로 생각해서 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고, 예언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물론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은사도 나타나고 치유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는 목적은 무엇보다도 천국 복음을 능력 있게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 위해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제가 곧 전설적인 능력 복음전도자인 위글스 워스의 책을 출간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가 다른 사역자들과 달리 성령사역의 핵심을 복음 전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증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기적과 능력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치유사역은 복음 전파에 종노릇해야 합니다. 심지어 복음전도에 쓰이지 않는 물질, 건강, 명예, 권세는 화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본문은 크게 4가지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18-19절을 읽겠습니다.


첫째, 포로 된 자가 자유케 됩니다. 포로는 전쟁용어입니다. 전쟁에 패하면 포로가 되어 인권을 유린당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구촌에는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되어 인권을 짓밟히고 살아가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요즘에 난민문제로 유럽이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떠나 위험천만한 난민의 길을 선택합니까? IS의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6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80-90세 할머니들이 일본대사관 앞에 가서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까? 일본과의 싸움에서 져서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의 노리개로 인권을 유린당했는데 일본이 사과도 하지 않고 보상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읽으셨을 때에 청중들의 귀가 솔깃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종’ 즉 ‘마귀의 종’에서 해방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와 마귀의 종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으면 죄의 종에서 자유케 될 수 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므로 의인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으면 죄의 포로에서 해방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마귀의 종으로 태어나서 죄의 종으로 살다가 죽은 다음에는 심판 받아 지옥에 던져져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시므로 완전히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복음을 전해서 마귀와 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둘째로, 눈먼 자가 보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듣고서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단지 육신의 눈만 뜨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영의 눈도 뜨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무나 영의 눈을 뜨게 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떤 자의 영의 눈을 뜨게 해주실까요? 복음을 믿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즉 복음을 믿으면 영적인 세계가 새롭게 열립니다. 어떻게 복음을 믿으면 영적인 눈이 뜨여지게 될까요? 복음을 믿으면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돈을 구원자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구원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인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구원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이 세상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으면 돈에서 벗어나 저 세상을 바라보게 되므로 영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영적으로 소경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영적으로 신령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를 거짓 메시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고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투옥하는데 앞장섰고 심지어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여 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예수께서 거짓 메시아가 아니라 진짜 메시아인 줄 알고 영적인 눈이 뜨여 남은 생애를 예수를 증거하는 일에 그의 생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적인 눈이 뜨였건만 오직 이 세상만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인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복한 밝은 눈으로 구원 받아야 할 자를 찾아야 합니다. 정말 복 받은 사람은 영안이 활짝 열려서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잃어버린 영혼을 그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들입니다.


셋째로, 눌린 자가 자유하게 됩니다. ‘눌린 자’란 강한 힘에 의해 억압당한 자를 가리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눌림을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사는 사람보다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회 구조가 피라미트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피라미드 구조는 반드시 하부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눌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면 눌린 자가 자유케 될 수 있을까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자매임을 알게 되어 상대방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영적인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가족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공동체입니다. 위로는 부모님이 있고, 아래로는 동생이 있지만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아닙니다. 부모가 위로 있지만 그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의 피로 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관계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눌린 자가 자유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단지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눌림에서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사도행전 10장 3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사람을 누르는 자가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귀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사람을 누르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하고, 우울해지고, 불안해지고, 온갖 염려와 근심이 가득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현상이 있을 때는 마귀가 누르는 줄 알고 주님께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심적인 눌림은 약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다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쳐주셨듯이, 지금도 주님께 나가면 심적 눌림을 다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넷째로, 은혜의 해가 전파됩니다. 본문에서 ‘은혜의 해’란 희년을 가리킵니다. 희년(禧年, 영어: jubilee, 히브리어: יובל, yobel 요벨)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를 가리킵니다. 희년이 되면 땅과 집이 원 주인에게 돌아가고, 노예는 해방되고, 부채는 면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빚을 많이 져서 집을 빼앗기고, 땅을 빼앗기고, 종이 되었어도 희년을 맞이하면 아무 조건 없이 잃었던 것을 다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희년제도는 복음을 통하여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복음을 믿으면 아무런 노력이 없어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자녀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멸하셨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어도 복음을 믿기만 하면 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다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착한 일을 하고, 선을 베풀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혹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에 넘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후에 따르는 책임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나사렛 사람들이 처음에는 감탄했지만 곧바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기 때문에 그들 중에는 돈을 주고 예수님께 부탁하여 자기 집 문짝을 고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말씀을 전하고 이적과 표적을 행하니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배척한 것입니다. 어쩌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자가 없다(24)고 하시면서 그 증거로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년 반 동안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과부가 살고 있었지만 엘리야가 찾아간 여인은 시돈 땅 사렙다 과부밖에 없었고(왕상 17:12-24), 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지만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이라는 장군만이 깨끗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왕하 5:1-14).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람을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이 원칙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데 그의 말에 믿음으로 반응하면 일하시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설교를 듣고 있지만 제 설교에 믿음으로 반응하면 역사가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라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능력을 맛보고 기적을 경험하려면 설교 듣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마귀의 포로에서 해방되었고, 영안이 열렸고, 눌림에서 자유를 얻었고,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복을 혼자서만 누리지 말고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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