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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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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8, 29: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그런데 베드로의 말이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하니까 예수님은 오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물위로, 물밑으로? 물위로 오너라!

 

만일 여기서 물위로는 올 수 없으니 물로 뛰어 내려서 헤엄쳐 오너라했다면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말이야 맞는 말이지. 누구든지 그 말 할 수 있지. 그리고 그런 말이야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으나 마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에 들어가 헤엄쳐서 가는 것은! 그러나 신앙사상적으로는 전혀 틀린 말이 되어 버립니다. 신앙사상적 계시적 뜻이 들어 있는 말이기 때문에 물위로 걸어가야 신앙성도로서 맞는 말입니다.

 

물은 물질세상을 말합니다. 성도의 신앙사상이 물질세상에 빠지면 그 신앙생명은 죽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사상이 물질세상 소원 목적으로 믿는 것은 죽은 신앙입니다. ‘세상물질에 대한 소원 목적으로 믿지 말고 이것은 발아래 밟고 진리를 붙잡고 깨달으며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목적으로 예수를 믿어라하는 이것은 물위로 걷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물위로 걸어 오라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고, 참 종이고, 물로 헤엄쳐서 오라는 이것은 물귀신 소리입니다. 이것은 거짓 종의 가르침이고 가짜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물위로 걷게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단 마귀의 음성은 사람을 물 속으로 자꾸 빠뜨립니다.

 

오라!’

 

시선은 오직 주님께로 초점입니다. 첫 발을 내딛을 때 발 하나가 배 안에 있는지, 배 밖에 딛었는지 자신은 모를 정도입니다. 몰라서 모른다가 아니라 정신과 마음과 시선이 총 집중이라는 말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지금 바닷물을 딛는 순간인데 어찌 장난 삼아 딛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어느 사이에 한 발 한 발 주님의 의사대로 물위로 걸어갑니다. ‘, 베드로 형님이 물위로 걸어간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이 물위로 걸을 수 있다니!

 

주님은 물위로 걸으셨습니다. 주님은 세상물질 위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으로 살으셨습니다. 천국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으로! 베드로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아니고 주님말씀에 의해서! 우리 기독자 성도들도 세상물질 위의 정신 사상으로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성도의 걸음걸이입니다.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이것이 이적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사상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전부는 물아래 즉, 물질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그 결과 타락된 정신으로 사는 것이 정상처럼 보이게 된 것입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의 구원운동은 사람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세상 타락된 물 속에서 물 밖으로 끄집어내어 물위로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느 정도 가다가 그만 물속으로 푹 빠져버립니다. ‘아이구, 베드로 형님이 빠졌다!’ 빠진 곳과 배와는 거리가 멉니다. 풍랑이 크게 일어나므로 구조하러 갈 수도 없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지만 빤히 쳐다보고도 속수무책입니다. ‘이제는 베드로 형님이 물귀신 밥이 되나보다

 

그런데 베드로가 가다가 왜 빠졌는지를 배 안에 있는 다른 제자들은 모릅니다. 알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물에 빠진 이유를 베드로 자신이 알고,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왜 빠졌느냐? 바람을 보고 빠졌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배 안의 제자들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니까 바다에 빠지는 줄 누가 알았겠느냐? 꿈에도 몰랐지!

 

실질적으로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면 물에 빠지는가? 안 빠집니다. 그러나 신앙사상적으로 보면 바람보고 무서워하면 물에 빠지고 맙니다. 영적 신앙사상의 이치를 모르면 빠지고도 빠진 줄을 모릅니다.

 

이 지구 땅덩어리라는 세상에는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사철마다 바람의 방향과 종류도 다 달라서 인간이 자기 몸을 지혜롭게 보호해야 건강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세상이라는 이 인간세상에서는 동서남복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색깔이 다른, 성질이 다른 바람들이 많이 붑니다.

 

경제바람 - 경제바람이 좋지 않게 불면 사람들은 마음이 오그라지고 걱정을 합니다.

과학바람 - 영재바람, 실력바람.

전쟁바람 - 어느 나라로 내뺄꼬!

문화적 예술바람, 유행바람 - 꼴찌가 될까봐.

종교바람 - 귀신바람, 외식바람.

정치바람 - 지방바람, 정실바람.

컴퓨터바람 - 시대바람, 시대적 과학바람.

 

이방 불신세상은 모두 그 바람을 타고 있습니다. 그 바람을 안 타면 출세 못하고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시대에서 도태될까봐 무서워서 그 바람을 타고 그 목적으로 사는 것은 전부가 물에 빠진 사람입니다.

 

이런 정신 사상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존귀적 위치적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인간, 셋째는 물질세상. 이것은 정확한 창조주 하나님의 진리이치입니다. 이 순서를 바꾸어 놓고 사는 것은 전부는 타락이고 거짓이고 육적이고 세상적이고 사망적이고 심판입니다. 멸망입니다.

 

바닷물.

인간 베드로.

 

베드로가 세상 큰바람을 보니 그만 무서워 물 속에 빠진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전 세계의 인간들은 타락된 이것이, 순서가 바뀐 이것이 물에 빠진 인간인 줄 모르고 사창가나 드나드는 사람을 타락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들은 자기는 의인인 것처럼, 구원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압니다. 무엇을 아느냐? 자기가 물에 빠진 것을! 배에 탄 제자들도 압니다. 물에 빠진 것을 주님도 아십니다. 너무 잘 아십니다.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니 즉시 주님의 손에 의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궁극적 근본목적대로 존귀적 위치적 순서적으로 사람을 제 자리로 찾아가도록 만드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이요 영운동이요 진리운동이요 천국복음운동인데 인간 제 자리 찾는 이치를 모르니까 사람을 세상이라는 물속으로 자꾸 쳐 넣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교역자 자신부터 물속에 빠져 있으면서 복음을 방자하여 사람을 물속으로 자꾸 더 깊이 끌어들이는 물귀신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사명감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 병고치고 복 받아 잘 살아라, 무슨 일을 하던지 복 받아 잘 살아라, 축복을 받아라, 응답을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구하라, 주실 때까지 구하라하며 성경구절에 대한 하나님의 본 뜻은 잊어버리고 전부는 일반적인 개념과 소원 목적으로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말을 하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줄만 알고 사람을 영원히 망하게 만드는 그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성을 갖는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물질세상이 우선적 위치적 존귀적으로 인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으니 인간 자기는 아래로 내려가게 되고, 세상이 물질이 돈이 자기 왕이요, 하나님처럼 제일이 된 것입니다. 이러니까 인간 자기는 환경을 다스림이 아니고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알게 되고, 의사적으로 자원적 순종이 나오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 지식성적, 하나님의 도덕성적, 하나님의 능력성적 사람으로, 질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대로 바로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물질 속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무당푸닥거리 미신의 전당으로, 우상종교 바알의 집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물귀신 노릇하면 안 됩니다. 그런 전당으로 된 신앙사상에는 하나님의 불심판이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베드로에게 물으니까 베드로는 바람이 불 때 무서워서 풍랑을 쳐다보니까 그만 물속으로 빠지더라하는데, 주님에게 베드로 형님이 왜 빠졌습니까?’ 하고 물으니 믿음이 적으니까 바람을 보자마자 그만 의심이 들어가서 빠졌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아니올시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서 빠졌다고 하고, 주님은 믿음이 적었기 때문이다누가 말한 것이 정확하게 맞는 말입니까? 누가 말한 것이 정답입니까?

 

베드로의 말대로 라면 눈을 감고 가면 바람을 안 볼 것이 아닌가? 바람을 안 보면 의심이 안 생기고, 그렇게 되면 바다 위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시선을 주님께 두지 않고 눈을 감고 물위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이냐? 주님을 목표점으로 안 보고 물위로 걸어갈 수 있는 일인가? 그리고 예수님은 무서워서 큰바람을 안 보려고 눈을 감고 걸어오는 중인가? 예수님도 큰바람을 보았지? 보았는데 왜 물에 안 빠졌느냐? 의심이 안 갑니다. 왜 의심이 안 되느냐? 베드로와 비교하면 믿음이 크기 때문에! 그러니까 믿음이 크면 아무리 큰바람이 불어도 의심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의심이 안 드니 물위로 마음대로 걸어 다닙니다.

 

베드로의 경우 작은 바람이 불더라도 의심이 가는 이유는 바람 때문인가, 자기가 믿음이 적은 때문인가? (믿음이 적은 때문!)

 

사건의 바람이 안 불면 안 넘어질 텐데 사건의 바람이 불어서 넘어졌다? 천국 같은 에덴동산, 하나님이 거니시는 공원 안에서 자기가 왜 넘어졌나? 자기가 넘어진 것이 외부조건에 있는 것이냐, 자기 내부조건에 있는 것이냐? 의심은 남이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적으니 만큼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물위로 걸어오라하신 분도 역시 큰바람과 상관없이 물위로 걸어갑니다. 베드로 자기만 물위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대로만 걸어가면 되는 것인데 조금 그렇게 걸어가다가 그만 큰바람을 보았습니다. 보여져서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육신생활에 큰 비중을 두고 보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 물위로 걸어가다가,

저 큰바람으로 큰일이 생기겠구나.

세상살이가 어렵겠구나.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렵겠구나.

자식교육, 출세가 어렵겠구나.

목회길이 어렵겠구나.

 

주님 말씀대로 진리대로 걸어서, 주님과 인격적 연속적으로 걸어서 주님을 만남보다 세상의 바람을 보고 더 크게 비중을 두었다는 말입니다.

 

어느 것이 지금 옳은 신앙으로 보입니까? 예수님이 지금 어디 위로 걸어가고 있습니까? 세상바람과 상관없이 아주 자유롭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맨발로 파도 타는 사나이입니다. 우리도 맨발로 파도를 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처럼 의심만 안 하면? 맞느냐? 틀립니다.

믿음만 키워나가면? 맞습니다.

열심히 기도만 하면? 틀립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그것보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격적으로 아느니 만큼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커지는 것을 자기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믿음에는 신의적 믿음이 있고, 신념적 믿음이 있고, 신뢰적 믿음이 있는데,

 

신뢰적 믿음은 믿고 의지하는 것. 편안히 살도록 해 주실 것이다.(생애 면)

신념적 믿음은 내가 이렇게 이렇게 나가면, 열심히 기도하면 사건을, 일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사건 면, 정신통일)

신의적 믿음은 그 분을 먼저 아는 것.

 

신의적 믿음에서는 신념적 신뢰적 믿음이 들어 있을 수 있으나, 신뢰적 또는 신념적 믿음만 가지고는 신의적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믿음이 커지려면 신념적 믿음보다, 신뢰적 믿음보다 신의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역 면에 열심을 부지런을 떠는 것보다 그 분을 먼저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바람은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데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시대적 유행의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사람은 많습니다.

 

크고 작은 사건과 환경과 모든 존재는 다 바람처럼 자나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시대적 유행바람을, 그 시대에 알아주고 돋보는 것들을 잡았다고 할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사이에 다 바람처럼 날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시간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잡은 것이 시간에 속한 것이면 시간 따라 다 변질되고 썩고 맙니다.

 

세상에는 그대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 바람처럼 지나간다는 말입니다. 사람도 지나가고 부귀 명예와 영광도 다 지나갑니다. 기쁨도 행복도 미움도 고움도 아름다움도 사랑도 다 지나갑니다. ‘지나가는 것을 붙들지 말라! 붙잡혀 줄 것이다 라고 생각지 말라! 그런 걸 구하지 말라! 자기가 목적적으로! 그런 것들을 자기 앞에 동원시켜 지나갈 때에 빨리 지나가던 늦게 지나가던 부지런히 깨닫고 신앙수입을 잡아라입니다.

 

교인들 몇 명이던 있는 동안에 우리가 할 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옳은 것만 뿌리고 가자! 뿌리되 옳은 것을 많이 뿌리고! 이것이 없는 목회는 완전히 헛 목회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순종자에게 말씀대로 사니 큰 사건이 왔습니다. 말씀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데 말씀대로 하자니 큰 사건이 됩니다. 이런 경우 특수은총 즉, 특수사랑을 주시는 방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상숭배신앙으로 산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앙으로 산다고 하자니 그들에게 뼈도 못 추리고 불에 타 죽는 풀무불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죽기를 각오하고 목숨을 내놓고 나가는게 신앙입니다.

 

이것이 미련한 신앙인가, 똑똑한 신앙인가? ‘세상에서 복 받아 잘 살아보세하는 구복주의 신앙자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되는 않는 신앙입니다. 육의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영의 일을 이해를 하겠습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를 얼마나 깨달아 알고 있느냐하는 것과 직결이 되는 것입니다. ‘사역을 얼마나 크게 했느냐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이 성전을 지은 자가 누구입니까? 성전을 으리번쩍하게 지었는데도 예수님과 상관없습니까? 성전을 크게 지었기 때문에 믿음이 크지? 상관없다! 면류관은 없어도 상급은 있겠지? 꼴 보기 싫다고 불에 태워 버렸습니까? 믿음이 적은 자여! 믿음이 뭔지 알고나 믿어야지!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며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주님의 언행심사, 모든 활동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활동이십니다. 눈동자 굴림도, 희로애락의 느낌도, 오각의 오감성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는 즉시도 진리요, 손도 진리요, 붙잡으심도 진리요, 붙잡는 마음도 진리요, 전 인격으로 붙잡으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냥 사람을 끄집어 올리는 것처럼 쉽게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일반적이라도 그렇지. 물에서나 구렁텅이에서 사람을 끄집어 올릴 때에는 끄집어 올리는 사람이 올라오는 사람보다 전 신경이 더 쓰이지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베드로를 건져 올렸습니다. 세상이라는 물질성 아래로 빠진 것을 건져 올리는 것은 교훈적인 측면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밖에 없습니다. 다른 교훈으로서는 사람에게, 성도에게, 교회에게 절대로 구원이 안 됩니다.

 

다른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복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닌 말로 성도 베드로가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하며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손을 잡으면 구원이 됩니까? 모두 다 물에 빠져 있는데!

 

온 세상 교회가 세상 물질성적인 정신 사상에 빠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 물질성적인 정신 사상에 빠졌습니다.

우리 교인이 세상 물질성적인 정신 사상에 빠졌습니다.

내가 세상 물질성적인 정신 사상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생명과 영생에로 구원이 되겠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에게 구원을 요청합니까?

 

구원이 뭔지 압니까? 베드로가 살려달라는 것이냐, 구원해 달라는 것이냐? 엄밀히 따지면 두 가지가 개념이 다르지만 보통은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한 번쯤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2천 년대에 천국이 도래하는 것처럼 부르짖고, 목표를 설정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총 집중을 시킵니다. 그런 것처럼 기독교회들도 미래지향적 목표를 설정하여 구호를 외치면서 마음을 기도로 총집중시키면 교회가 구원을 얻기도 하고, 신앙심이 살아나기도 합니까?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성도 베드로를 어떻게 다시 물위로 끄집어 올렸습니까? 성도 베드로는 누구의 손에, 어떻게 물위로 올라 왔습니까? 예수님께서 2천 년대 미래지향적 설정을 하니까 베드로는 그것 붙잡고 올라왔나요? 미래지향적 2천 년도라고 뭘 목표로 세워? 꼭 소리쳐야 구호입니까? 교회들의 주보를 보면 이 교회는 무슨 구호를 외치고 있구나를 알지요. ‘우리교회는 이 구호를 외칩니다. , 보십시오하며 보라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까? 보이게, 안 보이게 어떻게 사람의 두뇌를 살살 간지르는지!

 

주님의 구원역사가 인간의 어느 목표설정에 의해 움직이느냐? 인도자라고 하는 자기는 순 육덩이가 되어 가지고 2천 년대 목표를 정해주면 교회성도들이 영적 면에 살찌는 소리가 뿌득뿌득 들리지요?

 

교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인도자 자기부터가 성화구원을 이룰 수 있는 진리이치의 신앙사상이 되면 사람이 세상이라는 물에서 올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무 뽑아 올리듯이 땅에서 천국을 향해 사상과 정신 소원과 목적 면에서 올라가는 것이 이것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물위로 걸어가다가 빠졌습니다. 베드로 자기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줄 알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한 것입니다. 자기가 물에 빠진 줄 알아야 구원해 달라는 소리가 나옵니다. 모르면 안 나오지요. 나올 리가 없습니다. 물에 빠져도 모릅니다. 몇 발자국이라도 물위로 걸어가 본 사람이라야 자기가 물에 빠진 줄 압니다. 물위로 안 걸어본 사람은 자기가 물에 빠진 줄 압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왜 모르느냐? 물인 줄 모르니까!

 

구원을 지옥에서 천당하는 그 구원밖에 모르니까, 이룰 구원, 성화구원을 모르니까 충성 봉사 많이 하면 축복 받는다, 상 받는다, 면류관 받는다하는 이치에 안 맞는 말을 하면서 세상이라고 하는 세상물에 빠진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구복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 염세주의자들 은둔주의자들 기독교사회주의 기독교구국주의 외식주의 율법주의 현실주의 낙천주의 귀신주의 이단자들 극기 극복주의 등등 전부는 세상이라는 물에 빠져 있으면서 물에 빠져 있는 줄 모릅니다. 물에 빠진 줄 모르기 때문에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 몸이 바닷물이나 강물에 빠지는 그것만 알지, 일반적 도덕성적으로 나쁜 정신에 물드는 그것만 알지 비 진리적 세상성에, 이질적 비 진리적 종교적 정신 사상에 사람이 빠진 것을 모릅니다. 이방적 종교사상에 빠진 줄 모르니 그 면에서의 구원을 모르는 것입니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어려운 큰 일이 났을 때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사건도 주님이 주신 것인 줄도 모르고 마귀가 준 것으로 오해를 하고 해결해 달라고 악을 쓰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르짖는 구원의 개념이 아닌 자기 일을 해결해 달라는 이것은 구원이 아니고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풍랑은 누가 준 것인가? 하나님? 마귀? 왜 준 것입니까?

 

교회가 세상바람을 맞아 빠질듯이 흔들릴 때

먼저 믿은 자들이,

교회 인도자들이,

교회직분을 받은 자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 바다에 발을 딛는 것이니까!

 

향방을 길이요 진리이신 생명이신 주님을 향하여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세상바람, 사건의 바람을 보면 빠져 버립니다.

 

물위로 걸어 오라

 

천국을 소원 목적하고 궁극적 구원을 향하여 성화구원을 이루면서 물위로 걸어오라는 것은 세상을 밟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발등상이니 안 밟으면 자기는 물속으로, 세상 속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 이치를 어긴 삶이 되니까!

 

세상을 밟는 것은 성화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화구원은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 영적 이치를 아느니 만큼 이루어집니다. 물위로 걸어가라! 주님을 만날 때까지!

 

주님이 자기 교회 안에, 배 안에 들어오실 때까지 인도자가 큰바람이 오는 것을 보고 겁을 내면 안 됩니다. 겁내고 의심하면 그만 물에 빠지고 맙니다. (계속)

 

*************************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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