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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부의 실용주의 경제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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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실용주의 경제를 보며

- 배성산 목사 (서울교회)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는 지난 10년간의 진보를 자칭한 과거 정부들에 대하여 민주화, 민족, 통일지상주의, 명분론적 자주외교, 평등, 분배우선의 정치, 그리고 정치의 도덕화에 대한 이념정치의 분출을 막고 발전과 통합으로 21세기 국가 선진화를 체계적, 전략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차원에서 현 정부는 탈이념의 시대적인 정신으로 실용주의를 표방하게 되었다. 이는 이념이 아니라 실용을 선택한 국민에게 나라의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경제와 삶의 선진화로 대한민국을 열어 갈 것으로 기대한 바 크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미국과의 통상업무의 부적절한 과정이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100일의 李대통령의 실용적 경제철학에 대한 현실 문제들로 이곳 저 곳에서 터져 나온 비방의 소리가 하늘 가득히 차게 됨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李대통령은 6월19일에 ‘대국민담화’를 발표하였다. 대통령 취임 후 두 번째인 ‘대국민 담화’는 쇠고기 30개월 이상 수입차단 등 협상 결과와 그동안 정부가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점을 사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서 李대통령의 실용주의 경제와 선진화에 대한 실용성의 대통령의 철학을 주문하는 기회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용주의와 선진화는 삶의 향상과 더불어서 시대적인 가치의 산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경제의 향유로서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상 실용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을 미국 사회에서 적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사상이다. 

예컨대 진화론에서 종의 생존이라는 지상 목표에 부합하는 행동들 만에 정당성을 부여 받듯이 실용주의에서도 그 실용적 결과를 낳는 행동만 정당성을 부여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최근 세계의 정부들이 취하는 정책들을 보면 단순히 문제 해결을 하는 현상유지, 소극적 정책 들 보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달성하기위한 정책 수단들을 개발 집행하여 미래지향적이고 가치함축적인 정책들이 중요 시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회문제를 치유하는 수동적인 정책방향보다는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정책들에 비중을 두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비전 즉 가치문제에 대한 근본적 정책 현상들이 철학적 성찰을 통해 정책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학적인 방법들이 요구되고 있다는 주장들이 펼쳐졌으면 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는 경제 이익과 성장의 차원에서만 정책을 보게 된다. 이러한 점은 결국 실용주의의 의지에서 여러 가지의 통합과정을 소홀히 하고 철저한 탐구의 과정이 없이 이익 창출 및 가시적 성과만을 중시하는 결과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협소한 이해를 낳게 한 것을 알아야 한다. 종래의 관념론에 대신한 자본주의의 철학은 실 실용주의에 대한 인간의 성찰과 인간의 삶과 세계의 진리에 대해 많은 문제들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됨에 조심하여 사회의 풍조를 보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대상 또는 사실, 사물의 판단을 삶에 실용성 여부를 기준 하는 사고(思考)를 가지고 가치문제 즉 정신문제를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 지적한 바는 인간의 인지기관(認知器官)의 5감각(五感覺)으로 인식 할 수없는 관념의 세계를 배제하여 사회를 ‘경박한 사회’, ‘물질적 대량소비사회’로 보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삶에는 물질이상의 그 무엇이 항상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거하는 환경, 인간의 존엄성, 삶에 대한 가치관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면서 사회적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말인 것이다. 

인간은 숨을 쉬고 밥을 먹으며 생명체를 유지하는 몸으로서 육체를 갖고 있다. 이러한 생명현상의 과정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스스로가 선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삶에 뛰어든다. 자연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통해 즉 노동을 통해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였고 이 사회는 인간에게 역사적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언어를 갖게 되었고 물질적, 정신적 문화, 제도, 인간관계를 갖추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사실로 대한민국은 그동안 산업화의 정신과 윤리 없이 열심히 추진되어 온 한국의 부자층 특히 신흥 부자층은 경제윤리 없이 치부한 사람들로 그 시대를 엮어 왔다. 

이것은 다른 계층으로 하여금 열등감을 조장한다. 이른바 상대적 빈곤의식을 자극하여 계층 간의 갈등을 유발한다. 부유층에 대한 상대적 빈곤의식은 체제비판과 체제로 부터의 소외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우리는 능률의 극대화라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윤리의 극대화라는 다른 가치관도 필요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난 우리나라의 역사는 1860년대의 개항(開港)을 계기로 외부와의 관계에서 사회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타율적이었다.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사회변화가 급속히 발전된 것은 해방 이후이다. 1960년대에 와서 산업화정책으로 더욱 급속한 사회변화가 추진되었다. 여기에 따라 사회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어 왔음을 우리는 보아왔다. 

그로 인하여 먼저 우리전통의 문화가 붕괴 되었고 정직하게 말하면 한국의 경제 발전은 경제 윤리를 바탕으로 한 경제발전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원이 부족한 나라의 결점으로 발전을 기하고자 할 때 거기에는 과열된 경쟁의 가능성이 커졌다. 목표달성을 위해서 효과를 위해 부정당한 방법이라도 ‘하면 된 다’는 식의 발상이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편법주의가 생겨나고 절차문화가 훼손되어 질서 윤리가 마비되는 기이한 현상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아 왔다. 우리의 전통적인 경제윤리에는 청빈(淸貧)이 있다. 가난하지만 깨끗하게 산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높임을 받는다. 

그러나 가난한 것을 깨끗하게 보는 것만으로 아는 것은 옳지 못하다. 가난을 합리화 하기위해 청빈을 강조하는 것은 잘 못이다. 가난함을 윤리적 덕목으로 본다면 그 반대인 부(富)는 비 윤리의 항목으로 간주할 위험이 있다. 가난해도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부자라도 깨끗하게 산다는 윤리를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깨끗하게 부자 되는 생활태도가 중요하다. ‘산업화’하면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다. 부 자체를 불결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부에 이르는 과정이 정당한 절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냐 하는데 있다. 정당하게 이루어지는 이것이 곧 청부(淸富)의 윤리이다. 

이 청부의 윤리를 정립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경우가 그러듯이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를 알게 한다. 이것이 청부의 윤리이다. 이것은 곧 기독교의 경제 윤리임을 알게 한다. 그것은 하나는 청지기의식이요 또 하나는 소명의식이다. 이를 설명하면 청지기의식은 청지기는 주인이 아님을 알게 한다. 그것은 이기심을 극복한다. 생명과 재산의 궁극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요 청지기는 관리자인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충성과 헌신이 필요하다. 기업인은 자기의 재산과 기업이 갖는 공익성과 공공성(公共性)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재산의 주인은 자기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자기 공용인의 생명도 자기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기업주는 하나님의 집사(執事)이다. 여기서 분명히 하는 것은 공정한 분배의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된다. 19세기 말 미국이 여러 차례 경제적 공황에 직면했을 때 기독교사회학자들이 이 청지기의 의무를 자본가에게 촉구한 사실을 살펴야 한다. 자본주의가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천민(賤民)자본주의를 청지기 의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 기독교의 청지기의식이 다시 요구하는 시대이다. 또 한 가지로 소명의식은 오늘의 시대 모든 이들에게 직업의식이 된다. 더욱이 경제인에게 해당한다. 한 사회의 안정도는 그 사회의 직업만족도와 정비례한다. 

그러면 직업 만족의 근원은 무엇인가? 먼저 인간답게 사는데 필요한 만큼의 사람대우의 보수가 보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직업을 가치와 보람의 원칙으로 믿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명의식은 이 직장에서 나를 필요로 해 나를 불러 일하게 한다는 감사의 직업의식이 필요하다. 이 직업의식이 직업에 대한 또한 그 직장에 대한 성실도와 직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이 사회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위한 사업은 그리스도인에 의한 소명(召命)으로 사는 청부의 사업은 사회복지와 사회정의를 위한 사업이며 민중의 사업의 자리에 함께 나눔으로 민중에 의한 사랑받는 직업인이 될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의 노동의 윤리기준이 있게 된다. 사회의 경제 구조에는 구조적인 부조리가 있다. 그 구조악은 기득권의 자기 확장적인 생리에 의한 부(富)함이나 빈(貧)함이 개인의 성실한 노력과는 상관없이 구조적 부조리 속에서 서로의 갈등이 있음을 주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노동관으로 그 기준을 밝히어야 한다. 하나는 능력에 따라 노동의 보상이 분배되어야 하고 또 하나는 필요에 따라 그 보상이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이 무시되어 능력이라는 기준이 강자의 기준이 되면 불평등의 갈등을 야기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분배기준이 협력이 될 때 비로소 이상적인 경제공동체가 될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미국의 갑부이며 자선 사업가인 빌 게이츠는 지난 1월 세계정치, 경제계 지도자들의 연례모임인 다보스 포럼에서 현재의 세계의 양극화 문제를 지적하며 ‘창조적 자본주의’를 역설했다. 그는 ‘이윤 극대화를 위해 사용되는 인재와 기술을 이제는 빈곤 퇴치를 위해 조직화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세계 자본주의의 지도자로서의 위대한 통찰력을 보게 하는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지도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이윤의 극대화를 넘어선 더불어 살아가는 친절한 자본주의를 그리는 세상의 비전이다. 

지금 세계는 더 많은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책임을 같이하는 부자들을 부르고 있다. ‘지극히 작은 자인 형제와 이웃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에게 한 것’임을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 이것은 천민자본주의’를 지양(止揚)하고 ‘네오 프래그마티즘’을 지향(志向)하여 경제공동체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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