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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임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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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신앙 

- 최요한 목사(남서울비전교회 담임)


모든 일에는 필요조건이 충족되기 전까지는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는 그 조건이 채워졌을 때 비로소 일어나게 되는데, 이렇게 변화를 일으키는 일정량의 에너지를 ‘임계질량’이라고 합니다. 임계질량은 원래 원자물리학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수소폭탄이 핵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모두 일곱 개의 원소봉이 필요한데, 놀라운 것은 여섯 개의 원소봉을 집어넣을 때까지는 원자로 안에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곱 번째 원소봉이 들어가면 비로소 원자로 안에서 핵반응이 일어나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분출되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핵반응을 일으키는 수소봉의 일정한 양을 가리켜 ‘임계질량’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보면 어느 분야나 달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필요한 노력의 분량을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임계질량에 이르기 위해서는 막연한 기간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수적입니다. 사실, 그것이 인생의 신비요 삶의 묘미입니다. 역사를 봐도 조금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넘어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임계질량의 시기까지 기다린 인내심 때문입니다. 역발산 항우를 넘어선 유방의 경우가 그 좋은 예입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말년에 신비한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 떠있는 태양이 점점 다가오더니 시황제 앞에 떨어졌습니다. 진시황이 놀라서 뒤로 넘어졌을 때, 동쪽에서 청의동자가 달려오고 서쪽에서 홍의동자가 달려와 그 태양이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두 동자가 치열하게 싸웠는데,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청의동자는 홍의동자를 일방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렇지만 홍의동자는 맞으면서도 태양을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리다 지친 청의동자는 태양을 홍의동자에게 놔두고 물러나고 맙니다. 여기서 청의동자는 항우를 말하고 홍의동자는 유방을 말합니다. 

실제로 역사에서도 항우는 유방을 일방적으로 두들겼습니다. 항우와의 전쟁에서 수십 차례 패한 유방은 어느 때에는 너무 급해 타고 있던 마차에서 자식들까지 버렸고, 홍문의 잔치에서는 자존심까지 버리면서 자신보다 15살이나 어린 항우를 형님이라 부르며 임계질량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항우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기원전 202년 해하의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하자 강동에서 재기할 수도 있었는데 인내하지 못하고 하늘이 자기를 버렸다며 31살의 한창 나이에 자결하고 맙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유방과 항우의 결정적인 차이는 임계질량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의 차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임계질량은 있습니다. 그것을 임계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임계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에 눈이 뜨거나 기도가 응답되는 순간까지 요구되는 믿음의 분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내의 과정이 없이는 임계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비를 위해 기도할 때 여섯 번 사환을 보낼 때까지 하늘에는 아무 징조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일곱 번째 보냈을 때 손바닥 만한 구름이 나타나더니 이스라엘 전역에 엄청난 소낙비가 쏟아졌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사례를 보더라도 그리스도인들에겐 인내하며 기다리는 임계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를 기다리며 믿음으로 참고 인내할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 오실 때까지 길이 참는 임계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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