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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욕심과 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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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과 무지  

- 손달익 목사 (서문교회)
 

인도의 어느 강가 숲에 원숭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강의 나루를 건너다니는 행인들을 지켜보는 즐거움으로 매일 나루터에 출근하다시피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나루를 건너가다 강물에 휩쓸렸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어서 물결에 빠진 나그네도, 지켜보던 원숭이들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뒤따라 강을 건너던 한 젊은이가 강물에 뛰어들어 능숙한 수영 솜씨를 뽐내며 물에 빠진 나그네를 강 언덕으로 끌어올려 구출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그네는 수십 번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하고 인사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원숭이 한 마리가 마음에 부러움이 생겼다. '나도 누군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출하고 저런 인사를 받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매일 강나루를 지키며 사람 빠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후 좀처럼 물에 빠진 사람을 볼 수 없어 기대가 점점 무산될 지경이 되자 원숭이는 좀더 강 가까이 가서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본 상황은 원숭이가 보기에는 심각했다. 수많은 물고기가 물 속에 빠져 있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물 속으로 뛰어들어간 원숭이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물고기들을 건져 강 언덕에 던져 올렸다. 인도 민화 가운데 하나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순수한 목적과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열정이 있어도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으면 모든 일은 수많은 폐해를 남기게 되고 스스로의 삶을 심각한 실패의 수렁으로 몰고 가게 된다. 특히 신앙은 바른 신학에 근거해야 자신을 구원하고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의 은총을 선물할 수 있다. 신앙은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있을 때 비로소 구체적으로 시작될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이해한다. 신앙의 시작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전 과정이 올바른 지식에 기초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 미래도 합리성과 논리성에 근거하지 않으면 결코 다가올 수 없다.

일찍이 칼 야스퍼스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과학, 진실한 신앙, 비폭력성' 등의 요소를 이상적 미래상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가끔은 신앙을 빙자한 몰합리성을 강변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우리는 신앙이 합리성의 틀 속에 갇히지 않는 초월성이 전제됨을 잘 안다. 그렇다 하여 신앙이 몰이성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에게 비상식의 논리를 강요하는 일들은 신앙과 관련 없는 인간 욕심에서 나온다. 욕심은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고 마음의 평정심을 상실하게 한다. 어두운 마음은 분별력을 지닐 수 없고 평정심이 상실된 마음도 출렁거리는 물결처럼 그 바닥을 보기 어렵게 만든다. 무명이 곧 무지와 연결됨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못 박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저들이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안타깝게 여기셨다. 무지가 그토록 큰 잘못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이다.

열심도 있고 성품도 착하지만 그릇된 지식을 신념처럼 지키려는 사람은 그 자신과 주변 모두를 고통스럽고 난처하게 만든다. 모든 원인은 욕심이다. 욕심은 자기를 굽히지 못하게 하고 양보와 타협을 마치 변절처럼 여기게 만들어 끝없는 분쟁을 생산하게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해도 원숭이 물고기 건지듯 하고서는 하나님의 칭찬도, 사람들의 박수도 받을 수 없는 일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여러 교단의 교권 다툼을 보면서 문득 스스로 강가의 원숭이가 된 듯하여 하는 말이다. 문제는 박수 받고 싶어 하는 그 허황하고 치졸한 욕심에서 시작된 것임을 보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당사자들이 어떤 신념으로 무장을 했거나 무슨 그럴듯한 논리를 말하든 말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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