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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치유와 보살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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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보살핌  

- 전병욱 목사 (삼일교회)
 

최근 너무 '목적'에만 매달려 사는 것 같다. '목적이 이끄는 교회' '목적이 이끄는 삶' 등 온통 목적과 성취에만 관심을 갖는다. 목적, 매진, 성취라는 단순한 구도 속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목적을 강조할 때의 핵심은 변화다. 물론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다. 목적과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일면 당연한 일이다. "푯대를 향하여"(빌 3:14) 가는 인생이 성경이 말하는 인생이다. "방향없는 달음질"(고전 9:26)을 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요즘 치유라는 말을 많이 쓴다. 치유는 변화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치료하면 낫는다'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수술하면 낫는다'라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치유라는 말 속에는 뭔가 인위적이고 행동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치유라는 개념에서는 변화되지 않으면 사람이 지친다. 치유되지 않으면 희망을 잃게 된다. 그러면 치유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하버드 대학교수이자 작가였던 헨리 나우웬이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정신지체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에 들어갔다. 그는 라르쉬에서 치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 정신지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가 아니라 보살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살핌은 같이 울어주고, 같이 느끼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다. 단순히 같이 있어주는 것이다. 사실 변화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보살핌 외에는 없다. 변화되지 않아도 같이 있어주겠다는 자세가 보살핌의 자세다. 

과거에는 나의 목회 패러다임도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피곤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그런데 변화를 시도하니 지치는 것이다. '나도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데, 내가 누구를 변화시키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교인들을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리고 단순히 같이 아파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놀아주었다. 한마디로 보살핌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가 할 수 없으니 기도가 나왔다. 내가 변화시킬 수 없으니 단순히 아픔을 나누게 되었다. 내게 능력이 없으니, 하나님이 변화시킬 것을 기다렸다. 보살핌의 자세로 나아가니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 아픔의 나눔, 기다림이 온전히 다 이루어지게 되었다. 반면에 치유와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는 기도는 없고, 분주한 움직임만 있었다. 피곤하게 움직이는데 열매는 거의 없었다. 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 발버둥쳤기 때문이다.

속히 '능력의 종 신드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에게는 힘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 변화시키신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같이 가라. 변화되지 않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 사명일 수 있다. 이상한 것은 이렇게 보살피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치유를 경험할 때도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피곤하고 지칠 때가 있다. 그때 나를 변화시키려고 오는 사람, 나를 치유시키려고 오는 사람은 피곤하다. 단순히 나와 함께 이야기하고, 나와 함께 놀아주고, 나를 보살펴주는 사람이 좋다. 이런 보살핌의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치유가 일어난다. 단순한 보살핌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경험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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