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우울증을 넘어

첨부 1


우울증을 넘어  

- 오정현 목사 (사랑의교회)
 

올해는 유난히 안타까운 기사들로 지면이 채워졌다. 미국 쇠고기 수입으로 촉발된 광우병 파동은 대립과 갈등으로 순풍의 계절마저 잊어버리게 했고,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소식은 놀람과 슬픔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그리고 서브프라임으로 촉발된 경제 침체에 관한 뉴스들은 사회 전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처럼 부정적인 소식들이 지속적으로 누적되면 개인이나 사회는 우울증에 걸리기 십상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감정적인 처리에 미숙한 면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2000년 이후 자살자가 연평균 13%씩 늘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0개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보건복지부 자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살자의 80∼90%가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조사 결과는 우울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물론 우울증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누구나 삶의 질곡이 있게 마련이고, 그 속에서 삶에 짓눌려 살다 보면 우울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인 스펄전은 우울증으로 몇 주 동안 아예 활동도 하지 못하고 설교도 못할 지경이었다. 욥과 예레미야는 자기의 출생한 날을 저주할 정도로 영혼의 낙망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는 것은 신앙과 상관없이 타락한 이 땅에 태어난 자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울증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영적 침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 기도의 문이 막히고, 성경말씀이 모래알처럼 다가오지 않고 황량한 영적인 사막을 지나는 때가 있다. 이런 일은 주로 환경에 시선이 갇힐 때 일어난다. 8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이기고 승리하였던 기도의 전사요, 영적인 거인이었던 엘리야나, 담대한 믿음으로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영적인 거인이라도, 설사 예수님의 수제자라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대신 사건, 환경, 사람을 쳐다보면 반드시 은혜가 떨어지고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환경에 민감해지면 미래에 대해서 둔감해지고,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결국 환경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울증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신적인 필요와 감정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미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처음 2년간 제자반과 순장반 훈련에 전력하면서 새벽기도부터 주보까지 혼자 감당했고 밤 11시부터 1시까지는 심방을 하였다. 그러다 너무 피곤해서 고속도로에서 졸다가 앞니가 부러질 정도로 큰 사고가 났다. 

그때 기회를 얻어서 잠시 바닷가에서 일주일 정도 쉬는 동안 찬송가 133장 '어저께나 오늘이나'를 부르면서 심령을 회복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이후로 머리가 아프거나 피곤할 때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 습관을 기르게 되었다. 하루 저녁의 충분한 휴식은 우리의 시야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눈으로 주어진 상황을 보게 한다. 

우리가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길은 환경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육신과 감정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는 데 있다. 이럴 때에 비로소 교회는 어려운 환경을 넘어서는 소망의 터전이 되고, 피곤한 사람들의 진정한 영혼의 쉼터가 됨으로 사회의 우울증을 방지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 출처 : 국민일보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