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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의 두께를 쌓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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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현 목사 (사랑의교회)  

오래 전에 두어 달 동안 중국의 22개 성을 두루 다닐 기회가 있었다. 당시 중국 역사에 조예가 있던 한 지인으로부터 "중국의 역사는 길이가 아니라 두께로 말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중국의 여러 성을 돌아보면서 그 말의 의미를 실감했고, 기억 속에 새겨둔 그 말은 지금도 내 삶이 분주해질 때마다 사역의 흐름을 놓지 않게 하는 경계석이 되고 있다. 

두께로 말하는 역사는 과거에 무엇을 했기 때문에 현재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책임지는 역사이다. 오랜 역사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종잇장처럼 얇아져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영국 교회는 복음주의의 산실이요, 18∼19세기 종교 개혁의 진원지였지만 과거에 안주하고 현실에 무감각해지면서 머리 깎인 삼손처럼 한탄과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산동성의 곡부를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는 공자의 묘가 있고, 거기에서 40㎞쯤 떨어진 곳에 맹자의 묘가 있다. 중국은 예부터 공자를 왕의 반열에 올려놓고, 곡부의 묘는 거의 왕릉수준으로 꾸미고 있다. 반면에 맹자는 아성(亞聖)이라고 하여 성인에 버금가는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그런데 후대 사가들은 맹자를 중국의 정신사에서 기막힌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공자의 사상을 뒷받침하면서도 다음 세대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강희제를 이은 옹정제는 맹자에게서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꼈고, 맹자의 묘에 수선대후(守先待後)라는 편액을 내렸다. 선대가 남긴 좋은 전통과 유산을 지키고 후대를 대우한다는 말이다. 편액의 글이 섬광처럼 와 닿았다. 옹정제는 자신의 말처럼 건륭제라는 태평성세로 나아가는 시대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는 역사의 주인공을 자신보다는 다음 세대에서 찾고 준비하는 역사의 교각으로, 시대의 연결고리로서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은 것이다. 

필자가 사랑의교회에 부임한 지 5년이 다 되어간다.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대형 교회의 2대 목사로 가는 것은 목회의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과거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대형 교회에 2대 목사로 취임하여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경우를 거의 볼 수가 없다. 그 원인으로 크게는 교회 창립의 목회 철학의 실종, 교인들의 넘치는 기대 수준, 원로와 후임의 갈등, 과거의 명성에 함몰된 채 온고지신하는 정신의 상실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교회에 부임하면서 깊이 품었던 것 중의 하나가 선대와 후대를 잇는 다리로서 복음의 세대계승에 성공하는 목회자였다. 

영적인 수선대후의 의미가 필자에게는 과거에 신앙의 선배들이 쌓은 은혜의 터 위에서 복음으로 건강한 미래를 세우는 복음의 세대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교회의 실패는 복음의 세대계승에 실패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세대계승의 핵심은 과거를 인정하고 미래를 믿는 것이다. 역사는 자신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만하는 개인이나 나라에 결코 역사의 주연을 내주는 법이 없다. 대신에 역사의 주인공을 후대에 넘기고 자신을 세대의 연결고리로 생각하고 미래 세대를 준비하는 자에게 진정한 기회를 주었다. 역사의 두께란 시간의 축적이 아니라, 세대간의 튼실한 연결고리가 쌓아져서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쪼록 개인과 국가가 과거 세대의 공력을 생각하고 미래 세대의 영광을 간절히 생각하는 세대간의 연결고리를 자처할 때에 길이가 아니라 날마다 역사의 두께를 쌓음으로 우리의 청청한 미래가 담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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