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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관용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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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달익 목사 (서문교회) 

최근 중국 쓰촨성에서 대지진이 발생한 이후 중국은 국가적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모든 방송이 정규방송을 중단했고 온 국민이 오직 재난극복을 위한 노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 기간 중 한 연예인이 티베트를 방문하여 기념사진을 찍었다가, 환하게 웃는 모습의 이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국가적 애도일에 웃고 있다'는 것이 그의 잘못이었고 결국 그는 사과하고 모든 활동의 중단을 선언해야 했다. 그보다 약 한 달 전 중국 TV에 미국 오리건주의 어느 대학에서 진행된 티베트 지지시위에 참가한 한 중국인 유학생의 얼굴이 방영되었다. 네티즌들은 그의 신원을 확인했고 그의 모교와 부모의 집에도 시위대가 몰려가 항의했다. 견디지 못한 부모는 집을 떠나 잠적해야 했다.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우리사회도 비슷한 일이 생길 개연성은 충분하다. 비판과 공격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면 그 과정의 강약은 그리 크게 문제 삼을 수 없다. 또는 여론을 통한 비판기능은 시민민주주의의 한 형태일 수도 있다. 최근 우리사회의 쇠고기 파동도 그런 의미에서 상당한 시민들이 공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비판이 적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사고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벌을 받는 사람이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다'라고 생각해야 처벌의 교육적 기능, 교화적 기능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비판도 적정성을 유지해야 당사자도 수용할 수 있고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되게 된다.

이렇게 적정성을 유지하려면 먼저는 사실의 실체적 진실에 정확해야 하고 둘째는 결과의 공익성에 대한 책임감이 수반되어야 한다. 진실이 아닌 내용으로 공격하는 것은 비열한 행위이며 결과의 공익성이 담보되지 못한 비판은 사회적 무책임을 야기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가능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민주주의 사회의 비판기능보다 더욱 월등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가치가 따로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관용의 힘이다. 바울이 되기 이전의 사울은 극렬한 박해자였다. 그가 회개하고 예루살렘에 나타났을 때 예루살렘 성도들은 그를 경계하고 외면했다.

모두가 차가운 시선과 증오의 가슴으로 그를 맞이했지만 오직 한 사람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다. 그를 위로하고 교회에 소개하고 훗날 안디옥 교회의 동역자로 초빙했다. 지난날 사울의 모습을 몰라서가 아니다. 냉철한 비판보다 뜨거운 관용이 사람을 변화되게 하는 더 큰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나바의 관용은 사울을 바울 되게 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누구의 냉혹한 비판보다 사울의 가슴을 더욱 미어지게 하고, 부끄럽게 하고, 회개하게 만든 것이 바나바의 관용이었다. 그래서 그는 훗날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가르쳤다.

거의 저주에 가까운 독설들이 거리에 가득하고 인터넷의 댓글에는 입에 담기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한다. 물론 정당하고 적정한 비판은 가능하다. 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비판보다 더 능력 있는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시고 사도들이 전해준 가치인 관용의 가치이다. 조금만 더 관용하는 넓은 가슴을 지닌다면 좀 더 평화롭고 품격 높은 사회가 건설될 수 있지 않을까? 조급한 마음으로 관용의 시대를 열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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