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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소음과 진동을 에너지로 바꾸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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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현 목사 (사랑의교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소리는 생명의 증거이다. 살아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미미하게나마 소리를 내며 살아가고 있다. 소리에 생명이 깃들어 있기에, 심지어 돌 같은 무생물조차 구르고 부딪혀서 소리를 낼 때에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즘 우리 사회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살아있다는 말이다. 비록 소리의 색깔이 다르고, 소리가 향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우리 사회가 소리로 넘친다는 것은 생명으로 넘친다는 말이다. 소리는 쌍방향이 되어야 한다. 일방적인 소리, 하나의 색깔로만 치장된 소리, 메아리 없는 소리는 소위 '소통'이 없는 것이기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땅에 떨어져 묻힐 뿐이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대답 없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것처럼 불쌍한 '소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의 소통이 있다고 해도, 모두 소통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생명을 얻는 소통이 있고, 생명을 잃는 소통이 있는 것이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에 바디매오라는 맹인이 있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난다는 말을 들은 그는 소리를 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에게 그의 소리는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렸고, 사람들은 맹인이 더 이상 소리치지 못하도록 윽박질렀다. 그러나 그의 소리는 적어도 예수님에게는 소음이 아니라, 간절한 기도로 들렸다. 그는 그 소리로 구원을 얻었다. 바디매오의 '소리 지름'은 생명을 얻는 소리였다. 또 다른 소리가 있었다. 이들 역시 소리를 질렀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쳤다. 그들은 바디매오와 똑같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은 소란이요, 소음에 불과했다. 그들의 '소리 지름'은 생명을 잃는 소리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득 찬 소리는 생명을 얻는 소리인가? 생명을 잃는 소리인가? 소리의 크기가 진리의 크기에 비례할 수 없고, 소리의 수가 내용의 사실을 보장할 수 없다. 유대인의 광장을 가득 메웠던 수백 수천의 소리들은 길가에 먼지를 덮어쓴 초라한 맹인의 소리에 대비되는 비겁한 소리요, 사실은 큰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사는 길은 생명을 얻는 소리가 소음보다 커질 때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소음이 더 크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야미즈 고헤이라는 일본의 젊은이가 있다. 그는 올해 26세에 불과하지만, 일본의 주식회사 '음력발전'의 대표로 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세상의 소음과 진동을 에너지로 바꾸는 남자이다. 그는 작년 12월 도쿄 도심의 한복판을 달리는 자동차들이 발생시키는 진동을 이용해서 고속도로의 가로등을 켜는 데 성공했다. 그에게는 현대사회의 공공의 적으로 불리는 휴대전화의 소음마저도 에너지원이 될 뿐이다.

언제든지 세상은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 소음을 배척하고 피할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각자에게 들려지는 소음들을 생명을 담은 소리로, 국가적인 에너지로 삼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고헤이 젊은이처럼 불가능한 상황조차 창조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반드시 길이 열릴 것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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