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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피카소의 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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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염려  
 
- 손달익 목사 (서문교회)
 

며칠 전 도쿄의 한 미술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피카소전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연대별로 잘 정리된 전시회는 미술의 문외한에게도 피카소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쉽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1950년대 그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중 '한국의 학살'이라는 제목의 1951년 1월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개의 총구가 겨누어진 상황에서 벗은 몸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여인들과 어린이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은 평화가 무너진 상태에서 겪어야 하는 사회적 불안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었다.

그가 한반도의 학살을 묘사한 지 벌써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 12위의 경제 규모를 지닌 나라로 성장했고 남북 긴장 완화에 기여한 공로로 전직 대통령 한 분에게 노벨 평화상의 영광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의 12월에 만나는 남북 상황은 여전한 긴장과 대립이 반복되는 답답함의 연속이다. 기대했던 6자회담이 실패로 종결되었고 남북 교류와 협력은 냉각되고 있다. 참으로 불안하고 염려스럽다. 이런 시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쉽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나 이념적 입장이 아닌 한 기독인의 입장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기도해야 할 신앙적 책무 앞에 서 있음이 사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원칙에 충실한 북한 선교이다. 관계가 냉각되고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지금껏 만들어온 남북교회간의 협력 관계와 북한 선교를 위한 인프라들을 무용지물로 만들 우려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호하고 지켜야 할 북한에 남아 있는 소수의 신앙인들의 처지를 매우 어렵게 하고 그 신분을 매우 위태롭게 만들 위험도 실재한다. 이런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다소 단순해지고 방향도 선명해질 수 있다. 우선 우리는 인도주의적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대북 지원을 정부를 대신하여 추진할 필요성이 있다. 이 일은 북한 주민들에 대한 실제적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경색 국면의 남북 관계에 숨통을 유지하는 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실효성이라는 측면을 염두에 둔 북한 사역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우리 안에서 논란이 된 대북 전단 살포와 같은 일은 그 충정과 열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북한 주민을 설득해내는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같은 일이 남북 관계의 경색과 우리 정부 입장을 곤혹스럽게 하면서도 꼭 해야 할 만큼 실효성 있는 일인지 진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주관적 감정보다는 북한 선교의 실효성을 미리 헤아리는 지혜롭고 전략적인 접근이 긴급하게 요청되는 까닭이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향하는 북한 선교의 원칙이 드러난다.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 북한교회와 신앙인들에 대한 협력과 보호, 실효성 있는 선교 정책 등이다. 반세기 전에 있었던 피카소의 염려는 무력한 시민들이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전쟁의 잔혹성과 이로 인한 인간 파괴의 결과였다.

오늘 우리는 조금도 개선되지 못한 염려를 하고 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념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육신적 북한 선교를 심각히 생각할 때가 된 듯하다. 평화를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다리는 계절이기에 더욱 이 생각이 간절하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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