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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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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서있는가, 오시는가

- 배성산 목사(서울교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을 찬양하는 계절이다. 온통 세상은 크리스마스 축제에 빠져서 호화찬란한 네온사인과 흥청망청 축하연으로 들뜨고 있다. 누구의 생일을 맞아 축화 케이크를 나누며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고 기뻐하는 모습인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구주 탄일을 맞이할 때마다 신, 불신 간에 크리스마스에 대하여 만감(萬感)이 교차 된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도, 또 예수와의 나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부족함을 갖는다. 그로인하여 신앙인이나 예수가 교회의 주인이 되지 않고 내가 주인인양 행세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 예수가 없는 예수교인이요 예수 없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요즘 시중에 나온 <예수 없는 예수 교회>란 책이 개신교 장로인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총재가 쓴 글로 시중에 많은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와 교인의 삶 속에서 갈릴리의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교회와 기독교인의 위기’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주기도문과 산상수훈과 같은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없고 사도신경처럼 교리로 박제화 된 신앙고백만 하고 있다. 이런 신앙고백으로는 예수를 따라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 ‘예수가 보여준 낮은 곳에서 힘들고 핍박받고 차별받는 자들과 함께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어디로 가고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선교 구호는 값싸고 천박하여 오히려 구원을 비하하는 것”이라 하고 그는 과거 역사를 보면 “예수가 성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치장해 신격화만 하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 했으나 후대에 와서 십자군들은 십자가 신앙이 아니라 십자군 신앙을 따르고 있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지금은 예수오심을 축하하는 때다. 차제에 '예수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브라질의 코르코바두 산 정상에 조각상 '예수상'이 예수의 모습으로 웅대하게 우뚝 서 있다. 1850년 중반에 가톨릭 신부 페드루 마르티아 부스는 브라질 황제 페드루가 예수 조각상 건축을 계획했으나 1889년 왕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변모하면서 정교분리 원칙이 법제화 되자 조각상 계획이 무산 되었다가 1921년 리우데자네이루 대교구에서 거대한 랜드마크적 조각상에 그 형태는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 조각상을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제작비용25만 달러로 1922년부터 1931년까지 9년에 걸쳐 1931년 10월 12일 봉헌을 했고 9200킬로미터 떨어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단파무선 통신으로 투광 조명기가 조각상을 밝힌다. 

2008년 2월 10일 주일날 강한 천둥 벼락이 '예수상'에 떨어졌다. 다시 복구한 상태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등재 되어 브라질 정부는 '예수상'이 7대 불가사의 이후 관광객 유치 활성화를 위해 코르코바두 산 정상을 성역화하고 주변지역 정비작업을 하여 관광자원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또한 다른 ‘예수상’으로 이름난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시 동쪽 외각 산에 세워진 ‘예수상’이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 지역을 식민지로 점령하였을 때 세운 것으로 27m의 높이는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를 생각하게 한다. 이 거대한 조각상 단위에는 온화한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린 채 서있는 예수! 그 예수는 동티모르를 굽어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며 오랜 세월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동티모르는 국민의 98%가 가톨릭이라고 한다. 

여기에 우리나라 어느 신문기자는 그 곳을 다녀와서 쓴 ‘27m 예수상이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었다’고 한 기사를 보았다. 

우리는 예수에 대한 바른 정립을 가져야 한다. 그분은 삶의 방향에 새로운 지평선을 창조하신 분, 일찍이 사람이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길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룩하신 분, 그의 사랑의 삶, 그의 인격, 그의 생애는 과연 어떤 의미와 사명을 지니고 있는 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는 역사를 뚫고 들어오신 그 분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고 그 앞에 겸손히 머리 숙여 오시는 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조각상으로 서있는 예수는 사람이 가는 길을 멈추게 한다. 때를 따라가는 세월을 멈출 수가 없다. 예수는 한 곳에 오래 서있어 만인이 우러러 추앙받는 그런 예수가 아니다. 

서 있는 자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음이며 고착되어 석고(石膏)의 역할로 우뚝 솟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침체하고 쇠퇴하여 썩고 마는 특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굳어진 조각은 경직되어 그 자체만으로 우상화 되고 교리화 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는 한 곳에 국한하여 추앙받는 그런 예수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희망의 하나님은 오시는 하나님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낮은 땅에 지금도 오시는 예수이시다. 그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는다.’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 보이시려고 보고만 서있는 분이 아니시다. 인간의 삶으로 내려 오사 영원한 생명에 안긴다는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갖는 생동하는 삶의 사실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성탄은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로 오시는 분인 것을 알게 한다. 

옛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약속된 메시아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약속의 실현임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예수의 부재현상(不在現狀)이다. 1세기 동안 놀라운 교회성장을 거듭하면서 현재 전 인구의 25%에 달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성장과 발전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21세기를 바라보면서 한국 교회는 외형상의 화려한 모습만을 자랑하거나 만족해하고 있을 때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가 처한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자리는 서있어 성장의 거대한 모습을 보여주고만 있지 그 사회의 책임을 위해 소금과 빛을 나타내지 못한 것에 대한 예수 삶의 모습이 아쉽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한국 교회는 무속종교에 대항하여 미신적인 신앙을 각성시켜 우상과 미신을 타파하게 했으며 교육 사업에도 눈을 뜨게 하여 농촌을 개량하고 문맹퇴치운동과 독립정신과 애국, 애족을 위해 일해 왔고 문화와 정치적 변혁으로 민주주의와 민족의 통일문제, 사회전반의 정의구현을 위한 구조적인 부정과 불의를 보고 몸으로 싸워 왔고 그리고 공평하고 자유로운 인간화를 위한 시민사회를 주도해 왔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거대한 비대화와 물량주의의 포로가 되어 교회의 정체는 예수의 삶을 잃어 가게 되었다. 그로인해 신앙의 삶은 예수 없는 삶이 되고 교회는 사업으로 흥왕(興旺)하는 예수 위주가 아닌 세상과는 상관없는 교회당으로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교회가 사회에 대한 책임성은 약화되고 개 교회주의와 집단이기주의, 교파 분열과 사이비 종교의 범람, 신학교의 난립과 저질목회자양산, 계수적인 물량주의, 기복주의, 세속주의, 기업화 그리고 한국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각종 불의와 비인간적인 구조악의 실체 앞에서 침목 할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진리의 가치관과 참된 삶에 신앙관과 인생관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는 교회현실임을 아는 것이다. 

가장 신성하고 정직해야 할 교회가 물질문명의 한탕주의와 세속주의의 탁류에 휘말려 실종된 위기에 직면함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삶에 대한 예수의 이해부족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생각하며 예수오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다. 

동티모르를 굽어보면서 서있는 ‘27m 예수상은 삭아가고 있었다’는 기자의 보도는 우리에게 ‘서있는 예수상’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예수상’을 보면서 예수는 과연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시 한편을 소개하려 한다. 

이 세상에서 영원을 노래하고 ‘오늘’을 살아 하루를 영원으로 살다가 85세를 일기로 한 생애를 신앙으로 사신 시인 구상의 시(詩)에는 ‘예수님의 일생과 요약’이 담겨 있는 “나사렛 예수”라는 시를 여기 소개한다. 

나사렛 예수! /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 /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 상놈들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 원수로 여기는 고장치들과 어울리며 /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 가난한 사람들에게 / 굶주린 사람들에게 / 우는 사람들에게 / 의로운 일을 하다 /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 쫓기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에게 ‘행복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라고 / ‘하나님 나라는 바로 당신들 차지’라고 / 엄청난 소리를 한 당신, / 소경을 보게 하고 /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 문둥이를 말짱히 낫게 하고 /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도 / 스스로의 말대로 / 온 세상의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 쫓기다가 마침내 /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볼 꼴 없이 죽어 간 철저한 실패자, /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 맺어져 나의 삶이 바탕이 되고, / 길이 되고, / 때로는 멀리하고 싶고 / 귀찮게 여겨지고, /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 주고 /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 당신은 현세의 경륜가가 아니었다. /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 당신은 어떤 사회혁신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지 않았다. /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뒤엎고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 고통 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 다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오, /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없이 사랑할 때 /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이고 /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서 증거 하였다. 

詩人 구상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는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이 물음을 ‘나사렛 예수’라는 시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일생을 사실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온 몸으로 고뇌한 시인의 묵상이 깊이 배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구주 예수오시는 날’에 꼭 한번 새겨야 할 ‘예수상’을 나는 어떻게 고백하는지를 알게 한다. 오늘의 성탄은 ‘오시는 예수’를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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