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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너는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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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바로 나다  

- 김석년 목사 (서초성결교회)
 

한 소금 인형이 바다에 이르러 예전에 미처 본 적도 없고 알 수 없었던 것을 발견했다. 단단하고 작은 소금 인형은 딱딱한 땅 위에 서서 움직이고, 불안정하고, 시끄럽고,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새로운 땅을 보았다. 바다에게 물었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나는 바다야." 
"바다가 뭐지?" 
"그건 나야." 
"어떻게 하면 너를 알 수 있지?" 
"나를 만져 봐." 

소금 인형은 망설이듯 발을 내밀어 바다를 만졌다. 그런데 다시 발을 뺏을 때 발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덜컥 겁이 나서 물었다. 
"내 발가락은 어디 있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바다가 말했다. 
"너는 나를 알기 위해 무엇인가를 준 거야!" 

소금 인형이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바다는 그를 조금씩 가져갔다. 소금 인형은 바다를 알 것 같았지만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침내 파도가 소금 인형의 마지막을 녹여 버렸을 때 그는 깨달았다. '그래 바다는 바로 나야!'(앤서니 드 멜로의 '바다로 간 소금인형' 중에서) 

2009년 동트는 새해를 맞으며 경제 정치 사회 교육 등 총체적 위기의 먹구름이 걷혀지길 염원했다. 하지만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제 상황과 심각한 청년 실업, 국회 몸싸움 사건, 그리고 용산 철거 상가 화재 등 연일 이어지는 우울한 소식에 서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그야말로 바닷물 출렁이듯 불안정하고, 시끄럽고, 이상하고, 알 수 없는 땅을 보며 정체 모를 현실에 불안감을 느끼는 소금 인형의 심정이다.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 잘못인가? 누구 책임인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공방하며 시시비비와 잘잘못을 따지는 가운데 공동체의 갈등과 반목, 원망과 상처가 확산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처절한 고생을 해본 사람, 분열과 다툼이 얼마나 자기 파괴적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평화와 상생의 길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다"는 한 현인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평화와 상생을 향한 몸살을 앓는 것이리라 위로 삼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하나'라는 공동체의식이다. 궁극적으로 피해자도 가해자도 '우리'이다. 우리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피해자이고 우리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가해자이다. 우리 모두가 아픔의 현실 가운데 함께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는 결코 일정 사건이나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공정한 법적 판결과 처벌은 민주 사회의 질서이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각박한 현실에 불안하고 동요하는 마음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감정의 분출과 대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상대의 입장이라면 어쨌을까를 생각해보는 감정이입은 이성적 판단과 상생의 길을 견인한다. 부모는 자녀의 입장을, 자녀는 부모의 입장을, 정치인은 백성을, 백성은 정치인을, 경영자는 직원을, 직원은 경영자의 입장을 생각하는 데서부터 공동의 번영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인은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물어야 한다. 예수는 인간의 감정이입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의 한계를 십자가 상생의 삶으로 친히 보여주셨다. 그의 마지막 염원은 이것이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너는 바로 나다!" 엄동설한 폭설에도 불구하고 찾아갈 우리 가족이 있어 행복하듯 '너와 나, 우리'가 있어 희망찬 한 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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