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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물질의 선함과 성육신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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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선함과 성육신적인 삶  
 
- 리처드 포스터 <국제 레노바레 대표> 

 
기독교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 세계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 가장 물질주의적이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라고 주신 재화로 받아들인다. 기독교 신앙은 일부 동양 종교들처럼 물질적인 것들을 하찮은 것, 열등한 것, 악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물질세계의 재료들을(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이를 '거룩한 물질'이라고 칭했다)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이를 좋다고, 심히 좋다고 선언하셨다(창 1:25, 31).



신명기 16장 15절은 말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 때문에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큰 사랑으로 물질을 공급해주신다. 이 주제는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보다 더욱 세밀히 돌보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마 6:25∼34). 

그러나 이와 관련해 경고하고 싶은 게 있다. 사람들은 피조물의 선함에 대한 성경의 은혜로운 가르침을 자기 멋대로 왜곡시켜 놓았다. 예를 들면 물활론(物活論) 종교들은 언제나 물질세계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어서 결국엔 물질세계를 경배하게 된다. 오늘날 서양 문화 속에서는 고대 물활론 종교들이 다시 발흥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이런 왜곡 현상이 발생한다. 어떤 이들은 물질세계가 선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강렬한 금욕주의에 빠져 세상을 거부하며 세상을 참영성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 하나님이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물질을 공급해주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개인적 형통과 번영의 종교로 바꾸어버린 이들도 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부자가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물질세계의 선에는 한계가 있다. 물질에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물질에서 생명을 얻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다. 물질적인 것들은 하나님과 기타 피조물을 떠나 독립적 기능을 발휘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육체를 통해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 속에서 그 생명을 표현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이다. 물질세계는 악하지 않으며 영적 존재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구속(救贖)받은 우리의 몸 안에는 성령께서 거주하신다. 우리의 몸으로 성령과 조화되는 삶을 살 때 우린 인격의 점진적 변화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육체를 지닌 우리 자아는 움직이는 성전이다. 일상적인 활동과 인간관계 속에서 언제나 성령님과 협력하고 성령님께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간과 경험을 통해 우리가 가는 모든 곳이 '거룩한 곳'이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신성한 활동'이고,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거룩한 교통'임을 발견해야 한다. 성과 속을 가르는 날카로운 선은 지워야 한다. 하나님의 시야 밖에 있는 것, 하나님이 돌보시는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성육신적 삶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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