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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배신과 신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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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과 신앙인


인간관계에서 때로 “ 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쉽게 배신감을 느끼고, 배신감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고통이 분노가 되어 폭발하면 복수를 하게 됩니다.

복수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여인들이 배신 당하면 프랑스 사람들은 배신한 남자의 연적을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배신한 남자를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다른 남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연놈을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내연녀에게 배신당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여 40분 만에 엉뚱한 4명을 살해한 엽기살인 사건입니다. 내연녀가 "헤어지자"고 말한 뒤 계속 피하자 '배신'을 견디지 못하고 내연녀와 그녀의 새 남자친구를 함께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내연녀가 사는 다세대 주택에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지만 새로 이사 온 김씨가 "이전 집주인이 어디 사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자 "거짓말을 한다"며 주부 김씨를 칼로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연녀의 새 남자친구 집을 찾아갔으나 그는 없고 그의 부인과 두 딸이 있자 그들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했습니다.

[배신, 21세기를 사는 지혜/김용철 외]라는 책이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배신이 창궐하다고 합니다. 널리고 널려 있는 게 배신이고 수시로 겪는 것이 배신감이라고 합니다. 배신을 터부시하면서 배신자에게 혜택을 줌으로 '배신'을 권하는 사회를 장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배신이 인간의 본성적 기질이고, 치열한 생존 경쟁 사회에서 성공과 출세를 위해 배신은 필연적인 필수품이라고 해도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남을 속이는 배신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배신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배신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득이 누구에게 돌아가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익이 배신자이냐, 다른 집단이냐, 공공의 이익이냐에 따라 판단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대신 더 큰 집단에 대한 신뢰를 지키려는 노력으로써의 배신은 배신이 아니라 지식인의 책무라는 데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입니다.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가 속한 집단이 심각한 악을 저지른다면 용기 있게 고발해야 하고 사회는 그런 사람을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소한 이익을 위한 배신자가 대접받고 배신을 위대한 것인 양 포장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단테는 '신곡(神曲)'에서 배신자를 지옥 맨 밑바닥에 두었습니다. 제 1구역은 림보 성현들, 제 2구역은 애욕의 죄를 지은 자들, 제 3구역은 탐욕을 부린 자들, 제 4구역은 낭비하거나 인색한 자들, 제 5구역은 화를 잘 내거나 태만한 자들, 제 6구역은 이교도들, 제 7구역은 폭력을 휘두른 자들, 제 8구역은 사기꾼, 제 9구역은 배신자들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배신자로 자기의 스승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와 로마황제 줄리어스 시저를 암살한 그의 친구이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넣어 놓았습니다. 이들이 하고 있는 모습은 그 한복판에 세 개의 얼굴을 가진 악마대왕이 버티고 서 있는데 얼굴마다 밑에는 박쥐모양처럼 생긴 날개가 둘씩 돋아 있어 이걸 퍼덕이기만 하면 순식간에 바람이 일어나 모두를 얼어붙게 합니다. 여섯 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세 개의 턱에서는 피섞인 침과 눈물이 흘러 떨어집니다. 입마다 죄인 한명씩을 물고 이빨로 마치 삼 찢는 기계처럼 물어 찢고 있습니다. 정면의 사나이는 더 무참하게 발톱으로 찢겨 등가죽이 벗겨지고 등뼈가 훤히 들어나 있는데 이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 머리는 악마대왕의 입안에 있고, 발만을 내놓고 있습니다. 단테는 남에게 피해를 줄수록, 특히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줄수록 지옥의 밑바닥에 처넣었는데 이 풍자를 통해 인간이 짓는 죄 중에 가장 나쁜 죄가 '배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배신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악 중에서 가장 밉고, 더럽고, 비열한 최대의 죄악으로 본 것입니다. 성경에는 배신자들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삼손을 배신한 들릴라(삿16:18-20), 우리아를 배신한 다윗(삼하11:14-15), 아브넬을 배신한 요압(삼하3:27), 이스보셋을 배반한 레갑과 바아나(삼하4:5-6), 암논을 배신한 압살롬(삼하13:28), 아마사를 배신한 요압(삼하 20:10), 아비멜렉을 배신한 세겜 사람들(삿9:23), 르호보암을 배신한 여로보암(대하13:6),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마26:14-16) 등 그 누구 하나 정당한 배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에게 해를 끼치며 배신하는 행위를 스스로 합리화하거나 위장하여 정당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조나 충성이 현실적으로 가져다주는 이익이 적다고 해도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가치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폴리갑이 화형을 당하기 전 로마의 권위자가 그에게 물었답니다. 
"어떠냐? 이제라도 네가 섬기는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번만 부인하는 것이. 그러면 너는 살아 나갈 수 있다." 천천히 그 로마인을 바라보던 폴리갑이 고개를 흔들었답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강인하게 말했답니다. 

"아니오. 나를 저 불 속에 던지시오. 어떻게 내가 그 분을 부인할 수 있겠소. 오늘까지 그 분은 나를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는데!" 

성경은 말세가 되면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열린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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