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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도 안다, 놔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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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안다, 놔둘 수 없다         
 
- 김석년 목사 (서초성결교회)
 

호주 빅토리아주를 강타한 사상 최악의 산불로 어수선한 마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경남 창녕 하왕산 참사와 연이은 지하철 투신 및 사고 소식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재난과 무고한 생명들이 운명을 달리하는 현실 앞에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목회자의 심정과 고뇌를 누구에게 토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죽은 자도 살리는 분이 왜 외면하시는가? 신앙인들조차도 회의와 절망 어린 질문을 던질 때면 더욱 가슴이 아리다. 신학적인 답변을 못해서가 아니다. 구사일생의 기적은 인간의 공로로 돌리면서도 죽음의 섭리는 신의 탓으로 돌리는 인간의 본성을 누군가에게 호소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예고 없는 이별에 아파하고 닥쳐오는 죽음 앞에 고통하는 마음이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심성이며 나 역시 목회자이기 전에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할 말 없어 가슴앓이 하는 마음도 이렇거늘 할 말이 있어도 하지 못 할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랴 싶다. 그 심정을 헤아리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의 마음을 엿보게 된다. 그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했다(요 11:33∼35). 그는 죽은 자를 살리고 싶어했다(눅 7:12∼15). 그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했다(마 26:38, 39). 죽음 앞에 선 인간 예수의 모습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도 안다"이다. 사별의 아픔을, 살리고 싶은 심정을, 피하고 싶은 두려움을 나도 알기에 죽음 앞에 선 너의 맘도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알면서 왜 묵인하는가? 왜 그대로 놔두는가?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그냥 놔둘 수 없다'이다. 묵인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 절망, 불안, 인간적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신(하나님)이신 예수여야 했던 것이다. 인간의 심성을 통감하는 예수의 생명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는 신적 사명으로 완성되는 순간, 인간의 죽음은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지금 호주에서는 산불의 잿더미 위에 십시일반의 성금 모금과 자원봉사의 불길이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사망한 미국 배우 히스 레저의 유가족들도 성금을 보내와 임시 보호소에 머물고 있는 산불 생존자들을 위로했는가 하면 가난한 이웃나라 파푸아뉴기니에서 200만달러의 성금을 보내오면서 '호주는 이웃이라기보다 친구'라는 감동적인 편지를 동봉했다고 한다. 죽음의 고통, 없음의 불편을 동감하는 이들의 손길이 "나도 안다,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예수의 메시지를 상기시키는 듯하다. 

굳이 재난 현장이 아니더라도 내 곁에, 주위에, 이웃에 절망과 고통, 상실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이들을 기억하자. 육체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거듭난 생명은 영적 죽음을 전제로 하기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경험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신앙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를 운운하기보다 '나도 안다, 그냥 놔둘 수 없다'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며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죽음 앞에 선 인생을 향해 던지는 외침인 것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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