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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1운동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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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기독교  
 
- 조병호 한시미션 대표·목사
 

20세기 100년 동안 한국교회는 민족적 과제를 선도해 왔다. 올해는 3·1운동 90주년을 맞는 해이다.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불리는 3·1독립운동은 1919년 3월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면서 시작됐다. 그 뒤 1년여에 걸쳐 우리나라와 만주, 연해주 등 해외에까지 확산되었다. 그 결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 가운데 그 주동 세력이 뚜렷한 횟수는 340여차례 정도, 지역은 311곳이다. 그 중 기독교가 78개 지역, 천도교는 66개 지역, 기독교와 천도교 합작 42개 지역으로, 기독교가 25∼38%였다. 기독교나 천도교가 아닌 지역은 125개 지역이었다. 그해 6월30일까지 투옥된 사람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하였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만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2%였다.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7%였다.

일제강점기의 모든 운동의 최고봉인 3·1독립운동은 한국인 전체의 운동이었다. 천도교나 불교와 같은 타종교단체들도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다. 또 운동의 중요한 배경으로 1910년대의 국내외적 요건들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윌슨 대통령이 파리평화회의에서 제창한 14개 평화 원칙 가운데 식민지 처리 문제의 원칙을 밝힌 것이다. 즉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는 주장은 우리나라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을 비롯해 약소국의 민족 운동과 패전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많은 나라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국제 정세의 변화 조짐은 3·1운동을 바로 그 시기에 일어나게 한 객관적인 조건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 핵심경로에는 역시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 3·1운동의 모태가 된 2·8독립선언이 발표될 때 재일본 동경기독교청년회의 회원인 김도연 백관수 등 동경 유학생들이 모인 장소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었다. 

사실 일제는 1910년 소위 105인 사건 조작, 그리고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기독청년학생들의 운동을 위축시켰다. 그러나 기독청년학생들은 매년 실시하는 학생하령회(기독학생 여름수련회)를 통해 한일병합 후 1910∼1919년까지 오히려 전국 조직을 다지게 된다. 이는 3·1운동이 전국 운동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당시 유일한 전국 단위의 조직체는 종교계뿐이었다.

당시에는 기독교 교파간의 연합, 교류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1918년 서울의 중앙 YMCA 회관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각 교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회'가 창설되었다. 숫자 면에서 보면 장로교인이 16만여명, 감리교인이 3만여명으로 기타 중소교파까지 합하면 20여만명으로서 전체 인구 중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연합의 힘은 민족 전체의 힘을 규합하여 일제하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던 3·1운동을 이끌어 내었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새로운 연합의 물줄기를 형성하는 중이다. 한국교회의 연합이 이 민족과 동북아, 지구촌에 어떤 의미 있는 운동을 견인할지 기대된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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