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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4세기에도 있었던 사회법 vs 교회법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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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에도 있었던 사회법 vs 교회법 논쟁

- 송태흔 목사(동인교회) 


밀라노 감독 암브로시우스(334?-397)는 갈리아(현 프랑스) 수도였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트리어)에서 갈리아 총독 아우렐리우스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가정 덕분에 로마로 유학해 희랍어와 법률학을 정통으로 공부했으며, 당시 대도시인 시르미움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주후 365년경에 밀라노 지역을 다스리는 집정관이 됐다. 이후 북부 이탈리아의 리구리엔과 애밀리앤 주지사가 돼 근무하던 374년 밀라노 주교 反 니케아파 감독 아우센티우스가 갑작스럽게 죽게 됐다. 밀라노 교회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은 한 자리에 모여 새로운 감독 후임자를 결정하다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못해서 심각한 폭력사태로 이어지고 말았다.

사회의 공공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폭력 군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암브로시우스는 긴급하게 연설을 하게 됐다. 그의 연설을 열심히 듣고 있던 군중 속 한 아이가 갑자기 “암브로시우스 총독을 밀라노 교회 감독으로 보내자!”고 소리쳤다. 교회당 안에 모여 후임자 문제로 서로 싸우고 있었던 군중들은 만장일치로 어린 소년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영적 직분 수행을 주저하던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허락 없이 임직할 수 없다고 말하자, 당장 밀라노 교회 감독으로서 임직은 연기됐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황제 발렌티아누스 1세가 법에 따라 암브로시우스의 감독직을 승인했고, 374년말 35세의 젊은 나이에 밀라노 감독으로 안수를 받았다.

암브로시우스의 감독 재직 중 가장 큰 이슈는 악한 이단으로 알려진 아리우스파의 척결이었다. 아리우스파 신학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 성직자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론으로 ‘성자 예수는 창조된 피조물이며, 성부 하나님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말해 反 삼위일체 사상을 신학의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라는 초기 기독교 분파로 발전됐고, 정통 교회에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그들을 이단으로 단죄하였으며, 니케아신경에 ‘성자는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라는 신앙고백을 넣는 근거가 됐다. 이후 아리우스주의는 북방 게르만족의 민족 신앙이 됐으며,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밀라노 교회 암브로시우스 감독과 아리우스파의 실질적 일전은 발렌티누스 2세가 12세의 나이로 서방지역 황제가 되면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의 후견인으로 있었던 그의 어머니 유스티나가 385년과 386년 두 차례에 걸쳐 황족들의 부활절 예배를 위한 처소로 포르티아나 예배당을 양도하도록 강요하면서 발생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단들의 예배에 의해 교회당이 오염되고,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밀라노에 이단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세력이 증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예배 처소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가 보낸 무장 군인들이 암브로시우스가 사역하고 있는 밀라노 교회당을 공격하기 위해 겹겹이 에워쌌다.

출전한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교회당을 즉시 양도하고 나오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그는 교회당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를 강하게 반대하고 니케아 종교 회의의 정통 교리를 굳게 신봉하고 있는 신실한 성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은 교회당에 모여 있는 정통 신자들이 황제가 보낸 군대에 의해 모두 학살당할 것으로 예상했다. 교회당에 모인 성도들은 시편을 높이 찬양하며, 굳센 신앙으로서 황제의 군대에 맨몸으로 맞서고 있었다. 이런 대립적 상황에서 리더로서 목숨을 걸고 활동한 인물이 바로 암브로시우스 주교였던 것이다.

나중에 암브로시우스는 당시로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황제로 알려진 테오도시우스와도 맞서서 당당하게 싸운다. 390년경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교회 속의 소요를 진압하면서 무죄한 주민들을 대학살하는 지나친 불법행위를 자행했다. 악독한 불법을 저지른 황제에게 어느 누구도 대항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만 있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황제의 행위가 매우 악한 범죄행위라고 만방에 알리면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교회 앞에 나와서 속죄할 때까지 황제직에서 파문한다고 선포하게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참회가 있지 않으면 황제의 미사 참석을 금지시킬 것이며 출교까지 결정하겠다고 강경하게 통보한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준엄한 공개 심판은 당시 권력자였던 황제를 궁지에 몰아 넣었으며, 황제는 드디어 황복을 벗고 교회 성도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참회해야만 했다. 세상 권력이 하나님의 법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제국에 대한 충성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여겼지만,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암브로시우스는 최선을 다했다. 그는 ‘황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감독들이 황제 위에서 판단하는 것이지 황제가 감독들 위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는 사회법보다 교회법을 우선 적용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21세기를 맞이한 한국의 개혁주의 정통교회는 사회와 교회의 독버섯으로 등장한 이단들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단들은 자신들이 임의로 만든 거짓 교리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며 순진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주후 4세기경 건전한 사회와 교회를 오염시켰던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 생명을 걸었던 암브로시우스 감독 같은 신실한 지도자를 한국교회는 지금 찾고 있다.

또 작금의 한국교회는 교회법과 사회법 적용에 대한 우선순위 문제를 놓고 교파별로 오랫동안 난상토론을 하고 있다. 주후 4세기경 암브로시우스가 감독이 주장했던 것처럼 교회는 사회법이 아닌 교회법에 의해 우선적으로 정당하게 운영돼야 한다. 하나님 세우신 교회 공동체가 교회법을 버리고 사회법의 노예가 될 때 교회가 교회되기를 스스로 파기하는 행동이 된다. 주후 4세기경 암브로시우스 감독이 ‘교회 속에서는 사회법보다 교회법의 우선’을 주장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 원리는 변함없이 지속돼야 한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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