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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국가조찬기도회와 칼뱅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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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조찬기도회와 칼뱅주의자  

- 리처드 마우 풀러신학교 총장 
 

지난달 일이다. 워싱턴의 한 친구에게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할 거라고 말하자, 그 친구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칼뱅주의자가 되는 것에 관해 글 좀 써보라"고 내게 권유하는 것이었다(필자의 저서 중 '칼빈주의, 라스베가스 공항을 가다'가 있다).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다음날 아침 난 그의 제의를 가슴에 담고 워싱턴 힐튼호텔의 거대한 연회실에 앉아 있었다. 기도와 성경봉독, 특히 두 사람의 주 연사, 토니 블레어와 오바마 대통령의 감동적인 연설은 공적인 자리에서 신앙을 아주 근사하고 다채롭게 다루었다. 

그들 두 사람이 단순한 마음의 '시민 종교' 노선을 따르는 데 대해 나무랄 자는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일반 청중에게, 그것도 일반 문화 속에서 연설해야 했다. 그들 자신의 신앙공동체나 필자의 기독교 신앙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뭔가를 호소해야 했다. 두 연사는 선의를 품은 사람들 앞에서 공공의 선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 촉구했다. 

내 옆에는 리비아에서 온 무슬림 율법학자가 앉아 있었다. 난 칼뱅주의자로서 칼뱅이라면 내가 보고 듣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문해 보았다. 사실 이 종교개혁자의 일부 견해는 블레어와 오바마의 호소를 지지했을 것이다. 칼뱅은 인류 일반의 도덕적인 시민생활 능력을 꽤 긍정적인 용어로 묘사했다. 그는 죄가 인류 공통의 사회적 본성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시민사회의 공정거래와 질서에 관한 보편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인간 조직은 법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이해하고 있고, 그러한 법의 원칙들을 누구나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 속에서 참된 선이 파괴된 후에도 주께서 그 본성 안에 남겨두신 많은 선물들을 축하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칼뱅은 곧이어 보다 부정적 평가로 선회한다. 일반 인민이 시민사회 공정(公正)의 원칙들을 이해하고 있지만, 인간의 마음은 선한 삶의 추구에서 "절뚝거리고 비틀거린다." 그리스도에 의해 심령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시민사회 덕목들이 지나치게 훼손되어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그 덕목들은 모든 호의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그들 속에 외견상 칭찬할 만한 요소들이 있더라도 그건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UC 버클리의 역사가 윌리엄 보우스마는 자신이 쓴 칼뱅 전기에서 종교개혁자 칼뱅 속에 있는 이런 종류의 긴장을 "두 명의 칼뱅"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보았다. 하나의 칼뱅은 드넓은 인도주의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고, 또 다른 칼뱅은 엄격한 경계선을 그어야 할 필요성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조찬기도회장에 앉아 있던 필자에게는 보다 관대한 칼뱅주의자가 더욱 돋보여 보였다. 그러나 다른 칼뱅도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그 다른 칼뱅이 어떤 경고를 발해야 한다고 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간에는 나도 시민사회 덕목의 발휘를 축하하며 만장한 군중과 함께 두 사람의 주 연사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번역:김춘섭 예수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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