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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바보학(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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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학(學)  
 
- 리처드 마우(풀러신학교 총장)
 

반(反)지성주의의 표현들을 수집하는 게 내 취미다. 나 자신이 이런 장르에 속한 글들의 감정가임을 자처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필자는 지성적인 생활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영적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들었던 반지성적 농담들은 아직도 내 가슴에 메아리친다. "누구든지 다녀야 할 유일한 학교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의 성경학교다" "당신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면 반드시 교육을 이기라." 

그런 경고가 내게 깊은 경각심을 준 때도 있었다. 필자가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기 직전, 한 친구가 편지를 보냈다. 친구는 바울의 경고를 인용하며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 2:8)에 넘어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철학이라는 단어를 '바보학'(fool-osophy)이라고 바꾸어 표기했다. 

반지성적인 말들을 파악하는 데는 얼마간의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지성에 대한 공격은 특성상 어느 정도의 진실과 함께 지나치게 과장된 수사들을 담고 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생활의 반지성주의'에 인용된 19세기 감리교 순회설교자 피터 카트라이트의 말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신학교의 문턱에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지만 복음 사역을 행하며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죽어가는 가난한 죄인들이 하나님 없이, 복음 없이, 무수하게 지옥 길로 몰려가고 있지만 현대의 똑똑하고 유연한 신학박사들은 대학 총장 교수 주필 혹은 월급 많은 직책을 구하거나, 최신식 기관들을 세워 풍족한 삶을 독점한다. 그러나 그들의 친구들은 복음 전파에서 더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사역에서 더 많은 인증을 얻었다."

영적으로 검토가 필요한 반지성주의적 진술들도 없지 않다. 적절한 사례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두에 나온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겸손이 없다면 삼위일체에 대해 웅변적으로 논증하는 것은 유익을 주지 못한다. 둘째, 자신의 죄 때문에 심령이 상하지 않는다면, 심령의 찔림과 애통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할 줄 안들 그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셋째, 성경 전체를 학문적으로 알고 철학자들의 말을 알고 있다 한들, 사랑과 은혜 없는 지식이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토마스 아켐피스는 여기서 잘못된 예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누군가가 삼위일체를 잘 변호하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면 개탄할 일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도 세밀히 설명할 줄 알고 삶 속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줄 안다면 그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은혜 있는 지식의 함양을 추구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은혜 충만한 지성적 삶에는 중요한 미덕이 나타날 것이다. 그 중에는 겸손도 있고, 또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남을 섬기려는 욕구도 있을 것이다.

시몬느 웨일은 참된 지성적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덕목들은 영적 관상의 삶을 유지하는 미덕들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깊은 사색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중요한 연습일 수도 있다. 최소한 몇몇 사람은 '바보학'의 직책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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