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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십자가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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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아이러니  

- 김원배 목사(목포예원교회)
 

십자가는 예수님의 생애라는 산맥 가운데 '정상'에 해당된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고난과 십자가의 내적 논리는 무엇이었는가? 요한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말로 예수님께서 걸었던 고난과 십자가의 내적 논리가 사랑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선포, 가르침, 치유를 통해 유대 율법주의 틀 속에 갇혀버린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보고(寶庫)를 활짝 열었다. 이것은 율법으로부터 소외되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진 가난한 무리들에게 기쁜 소식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랑의 내적논리는 유대교의 기득권 세력들과 적대전선을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나사렛에서 온 예수는 점점 더 의혹의 대상이 됐다. 천대받는 자와 소외받은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율법의 논리를 부정하고 은혜를 선포하는 행보는 많은 사람들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행태가 거룩한 관습들의 뿌리를 훼손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자연히 기존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서로 뭉치게 했다. 평소에는 적대적이었던 가야바와 빌라도 사이에 이뤄진 세속권력의 결합은 그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을 느꼈는가를 설명해준다.

그 결과는 처참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잔인한 고문과 무자비한 처형이 뒤따랐다. 십자가 처형이 특별히 잔인한 것은 임종 때까지 고통의 시간이 길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저주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신 21:23)이다.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가 가는 곳은 세올이다. 세올은 하나님의 은총이 미치지 못하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죽음의 세계이다.

무엇보다도 십자가 사건의 아이러니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선포했던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하나님 없는 자'로 정죄하고 못 박은 것이다. 참으로 십자가 처형이 거행되었던 성금요일은 어두움의 날이었다. 유대인들이 계획했던 대로 그날은 하나님 부재의 날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는 절규 가운데 운명하셨다. 이 절규와 더불어 나사렛 예수의 삶이 끝이 나고 하나님에 대한 선포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랐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부활의 빛은 성금요일 밤에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이날은 하나님 부재의 날이요 충격의 날이었다. 사랑이 빚어낸 참혹한 결과로 믿음도 희망도 무너지는 날이었다. 십자가의 형틀을 세운 사람들은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부활절 아침은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았다. 부활의 아침, 하나님 없는 자로 저주받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에게로 하나님께서 돌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없는 자로 저주받은 자가 하나님과 함께함을 온 세상에 증거하셨다. 하나님 스스로가 부활의 증인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께로 돌아오심으로 우리에게로 오셨다. 임마누엘!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 24:5∼6)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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