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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거울속 역사 : 십자가의 길, 십자군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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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규홍 교수의 거울속 역사(3)    
 
- 연규홍 교수(한신대·교회사)
 

십자가의 길, 십자군의 길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수용된 것은 복음 자체의 본질적 가치보다는 민중의 해방열망과 근대국가 형성을 위한 도구적 가치 때문이었다. 조선 봉건사회의 내부적 모순에 의한 억압과 착취, 서구 열강들의 침략의도로 인한 전쟁들이 일어났다. 당시에 조선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무엇인가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더욱 커져 그리스도교 힘에 의한 개화와 근대 시민사회를 향한 열망을 갖게 했다. 

한국교회의 신·구교 갈등인 교안사건이 발생한 맥락이 바로 이것이다. 초기 박해를 통해 천주교는 양반층에서 서민층으로 그 대상을 확대하여 대중성을 획득하고 1886년 한·불 수호조약 이후 프랑스 천주교의 후원을 받는 조선 천주교회는 종교적인 지원뿐만 아닌 정치적 지원을 받으며 사회세력화하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천주교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교세 확장을 하던 개신교와 갈등이 빚어진다. 이것이 이른바 해서교안(海西敎案) 사건이다. 이 사건은 본래 1900년부터 1903년 사이 황해도 지역인 해주, 신환포, 재령 등에서 일어난 신·구교 사이의 갈등에서 시작됐으나 쉽게 무마되지 않고 당시 프랑스와 미국 등 선교 후원국들 사이에 갈등 문제로까지 확대된 일종의 교폐사건이라 할 수 있다. 

1902년 5월 해주에서 천주교 교회당을 지으면서 천주교 신자들은 사통(私通)을 통해 개신교 신자들에게까지 건축 기금을 강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불응한 개신교 신자를 감금하고 구타하자 개신교인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이 문제를 천주교 신자들은 프랑스 신부들을 통해 거짓 공문으로 중도에 무마하려고 하자 황성신문이 이를 게재해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천주교 측이 이 사건을 명예훼손으로 되받아치며 배후세력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을 공격했다. 

또한 신환포에서는 개신교 신자인 이승혁이라는 사람의 소가 갑자기 죽었는데 이어 옆집에 천주교인 김순명의 소도 따라 죽었다. 이에 김순명은 천주교인들을 동원해 소값 배상을 요구했다. 이승혁이 불응하자 폭력을 행사하고 강제로 배상금을 받아냈다. 이러한 사건은 급기야 조정에 알려지고 조정이 천주교인들을 소환하려 했으나 프랑스 공사관조차 가해자들을 편들며 소환을 거부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미국 선교부와 공사관을 통해 천주교 측 행태의 부당함을 보고하고 외교적 힘으로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오늘 우리가 해서교안(海西敎案)사건을 통해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일까? 한국이란 선교지를 두고 천주교와 개신교가 서로 열심을 다한 것을 탓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방 행정의 공백과 조정의 무력함을 빌미로 외국의 정치, 경제적 힘을 배경으로 해 종교가 사회적 세력화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은 ‘힘이 진리’가 되는 십자군의 길이 아니다. ‘진리가 힘’이 되는 십자가의 길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적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 할지라도 천주교와 개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모습보다는 선교영역과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과 갈등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과 십자군의 길을 혼돈한 데 그 근원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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