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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부패한 사회 정화할 유일한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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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사회 정화할 유일한 대안

복음으로 사회를 개혁한 독일 선교사 보니파키우스 


- 송태흔 목사(동인교회). 

독일 색슨족을 위한 선교사, 복음으로 사회를 개혁하는 데 평생을 바친 윈프리드(보니파키우스의 본명)는 원래 영국 웨식스의 귀족 가문에서 부유하게 태어났다. 귀족을 부모로 둔 덕분에 베네딕투스 수도회 소속 아데스칸카스트레(엑시터) 대수도원과 누트스켈레 대수도원에서 최고급 신학 교육을 연속으로 받는다. 이후 베네딕투스 수도회 소속 수사가 됐으며, 30세쯤 정식으로 사제 서품을 받는다. 탁월한 학문적 재능과 교회 지도자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는 고국인 영국 땅에 머물러만 있어도 힘 있는 학자요, 안정된 목회자요, 사회 개혁가의 길을 수월하게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은 선교에 대한 비전이 그로 하여금 고국에만 편안하게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했다. 기독교 국가인 영국에서 받은 안위와 명예를 송두리째 버리고, 그는 어렵고 힘든 독일 선교사로서의 험난한 여정을 선택하게 된다.

그가 활동할 당시, 주후 8세기 초에 독일 색슨인들은 잘못된 이단 신학과 더불어 자신들이 만든 미신적인 신앙을 마음대로 섞어 혼합 교회와 혼탁한 사회를 세워가고 있었다. 그들은 우레목을 신성한 나무로 알고 절대적인 신으로 섬기며 타락한 삶을 살고 있었다. 여행 중 이것을 목격한 보니파키우스는 프리지아에 사는 색슨족들에게 두 차례나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했으나, 그 지역 왕인 우상숭배자 라드보드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던 중 자신이 섬기던 영국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보니파키우스가 대 수도원장에 전격 선출된다. 그러나 마음 속에 이미 깊숙이 박힌 타락한 나라, 독일 선교사로의 길을 가기 위해 수도원장으로서의 개인적인 높은 영예를 모두 포기한다.

보니파키우스 선교사는 다시 혈혈단신 프리지아로 돌아가 지역의 주교 윌리브로르드를 도우며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722년 헤센으로 가서 그리스도교 사역을 강화하기 위해 베네딕투스 수도회로서는 최초의 수도원을 세우면서 선교 사역이 활기를 띠게 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는 그를 로마로 불러 선교 주교로 임명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재상 카를 마르텔 등 사회적으로 저명한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보니파키우스가 수행하고 있는 독일 선교 사역 및 사회개혁 사역을 적극 돕도록 부탁한다. 영국에서 건너온 베네딕투스 수도회 수사들과 수녀들에게서도 재정 지원을 받아 그의 사역은 환상적인 꽃을 피우게 된다. 사심을 버리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 사역에 매진하자, 좋은 천사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보니파키우스는 725년부터 735년까지 약 10년 동안 투린기아에서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타락한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다. 또한 그가 선교하기 전 미리 와 있던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전도해 기독교로 개종한 초신자들에게 성경을 철저히 가르쳐 신앙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잘못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을 바르게 교정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때부터 보니파키우스는 한심스러운 방법으로 전도하는 아일랜드 선교사들을 발견하면 즉시 로마 교황청으로 달려가 혹독한 처분을 호소했고, 그들을 통해 잘못된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을 온몸으로 막는다. 그는 성경에 입각한 순수한 복음만 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 (731-741)가 바이에른에 교회를 세우라고 요청하자 순종하여 그곳에 4개의 주 교구를 만든다. 그는 바이에른을 복음화함으로써 그 지방이 결국 카롤링거 제국에 병합되는 길을 닦는다. 주후 740년 이후 그는 바이에른에 또 하나의 주 교구를 만들었고, 독일 중앙에도 3개의 주 교구를 더 만든다. 보니파키우스는 오순절 주일 아침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다 앙심을 품은 프리지아 이교도들에게 안타깝게도 순교당한다. 그의 무덤은 평소의 유언대로 풀다에 있는 바로크 장식의 석관에 안장됐다.

행정가요, 교육가요, 종교 개혁가요, 사회혁신가였던 보니파키우스는 중세 내내 독일과 프랑스의 지성사, 정치사 및 교회사 등 다양한 방면에 깊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가 세운 수도원들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주교와 교사 등 탁월한 지도자들, 사회 혁신가들을 배출함으로써 프랑크왕국 생활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그는 독일을 기독교로 복음화해 사회를 기독교식으로 개혁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독일의 사도라 불려지고 있다. 그가 남긴 편지들과 당시 사람들의 글에 의하면 그는 목적 의식이 분명하고 헌신적이었으며, 비록 고집스럽긴 하나 영향력 있는 사회혁신가, 신앙 개혁자였던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009년 4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거의 대부분 일주일 동안 2천년 전 우리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 당하시고 사흘만에 육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게 묵상했다. 성도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며, 특별 새벽예배에 적극 참여하면서 주님 겪으신 고통의 길을 조금이나마 체험했다. 선교사 보니파키우스가 독일 땅을 오직 성경으로 복음화하기 위해 주어진 모든 특권과 특혜를 팽개쳐 버리고 타락한 독일로 선교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한국교회도 21세기가 낳은 반(反)성경적 물질만능주의와 육신적 쾌락주의에 대항해 올바른 복음을 날마다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교회는 21세기의 타락한 사회가 안겨주는 달콤한 특혜를 세상 사람들처럼 누려서는 안 된다. 특권주의와 쾌락주의에서 적극 탈피해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깊이 묵상함으로 반성경적으로 타락한 사회를 복음으로 개혁하고, 부패의 온상인 국가 조직을 복음으로 새롭게 정비하는 기수가 돼야 한다. 청와대가 검은 거래의 온상이 더 이상 될 수 없도록 하나님의 교회가 살아있는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적극 나서야 한다. 세상의 어떤 조직도, 세상의 어떤 학자들의 논증도 부패한 사회를 정화할 수 없다. 오직 능력있는 복음을 소유한 하나님의 교회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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