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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4·19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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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와 기독교  

- 조병호(한시미션 대표·목사)
 

모세의 가장 중요한 직업은 두 가지였다. 그 중 하나가 장례위원장이다. 장정만 60만명인 출애굽 세대가 광야생활 40년 동안 죽어 묻히는 것을 모세는 지켜보았다. 또 하나는 기독청년운동가다. 가데스 바네아에 머물 당시 20세 이하였던 청소년들을 모세는 40년간 훈련시켰다. 이러한 모세의 기독청년운동은 한 세대를 배출했다. 필자는 이들을 '만나세대(Manna Generation)'라 부르고 싶다. 바로 이 만나세대와 더불어 여호수아는 새로운 가나안 시대를 열었다. 

기독청년운동가 모세로부터 시작된 성경 속 세대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350년 사사시대의 어둠을 뚫고 사무엘은 '미스바세대'를 탄생시켰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사역은 '제자세대'를 탄생시켰다. 이처럼 성경 속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하나님의 시대 경영에 있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역사를 진행시켰다. 

지난 100년의 한국 역사 속에서도 세대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1960년 이승만 정권 시절 등장한 4·19세대, 64년 박정희 정권 시절 등장한 6·3세대, 그리고 이후 80년대에 등장한 386세대가 그것이다. 특별히 '4·19세대'의 탄생은 기독교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4·19 학생운동 이전까지 한국 기독교는 자유당 정권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한국 개신교의 이승만 정권 지지는 거의 무조건적이었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가 그 구심점 역할을 했다. 가령 52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NCC는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중앙과 도, 군, 개교회 위원까지 조직하고 선거 직전 주일에는 '선거기도일'을 정하는 등 적극적인 지지 운동을 펼쳤다. 60년 3·15부정선거에 대해서도 대다수 기독교계가 공명선거라며 지지를 표했다. 

당시 교권주의에 의해 교파가 사분오열되었던 한국교회는 자유당 정권의 권력 연장을 위한 온갖 반민주주의적 작태를 하나의 목소리로 저항하지 못하고 방치할 수밖에 없는 자기모순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기성층과는 달리 3·15부정선거 결과에 대해 기독학생들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강원용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4월18일 국회의사당 앞에 나와 데모를 하도록 고려대 학생들을 주동한 학생이 경동교회 박상원입니다. 그리고 4월19일 국회의사당 앞 데모를 주동한 서울대 학생회 위원장 윤식과 간사장인 윤영일, 둘 다 경동교회 학생이었습니다." 또 손봉호 교수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4·19때 보니 독서회에서 활동하던 학생들이 주로 많이 참여했습니다. 적극적인 사람은 7∼8명이었는데 서울대 문리대 김미항, 이명섭 학생 등이 처음 독서회를 하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김동길 교수도 정부 수립 후 신탁통치 문제 등으로 인해 생긴 대학 내 폭력 사태에 대해 기독학생 그룹들이 반대하고 일어났음을 지적했다. 

이처럼 60년대 성경 공부나 독서 서클을 통해 민주주의 이념을 막연하게나마 학습해갔던 기독학생들이 이승만 독재에 대한 저항의 동력으로 자라났던 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 기독학생들이 4·19 학생운동의 주축이 되었다고 본다. 

지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세계 경영을 바라보며 모세의 역할을 꿈꾸는 청년운동가들이 좀더 많아져야 한다. 이 청년운동가들의 성경 교육을 통해 새로운 21세기형 만나세대가 탄생됨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지구촌 시대가 열리길 기대한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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