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hugging(포옹)의 신학

첨부 1


hugging(포옹)의 신학  

- 리처드 마우(풀러신학교 총장) 
 

한 기독교 잡지에서 교회 안의 포옹을 흥미롭게 다룬 적이 있다. 포옹이 다른 교인들과의 인사 형식으로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적절한 규칙만 지킨다면 교회의 건전한 예법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포옹이 현실적으로 어떤 유익과 문제를 낳을 수 있는지에만 할애하고 있을 뿐 신학적 성찰은 거의 없었다. 예수님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사람들과 접촉하셨다는 주장이 있긴 했으나 이것은 지나친 말이 아닌가 싶다. 포옹이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행위라는 식의 진술은 아무리 온건하게 말하더라도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필자는 과거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시각에 따라 교회 안의 포옹에 관한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그 문제를 고찰하게 된 건 1970년대 교회에서 있었던 어떤 경험에 자극을 받아서였다. 주일을 맞아 예배당으로 들어가자 입구에 서 있던 사람이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제가 포옹을 해도 괜찮을까요?" 나는 이를 보고 아내에게 속삭였다. "내 자리 하나 잡아줘요." 그리고 돌아서서 주차장으로 나가 예배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렸다. 난 누군가와 포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주권 신학을 주장했다. 하나님이 피조계의 질서 안에 가정생활, 예술행위, 정치, 과학적 탐구, 경제활동 등 다양한 사회적 영역들을 세우셨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이런 영역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 영역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 가정은 창조 때부터 비즈니스와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고 정부는 교회와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영역주권에 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난 둘 사이에 어떤 연계성이 있음을 깨달았다. 포옹은 교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가족적인 행위다. 가정은 교회가 아니다. 내 결론은 이랬다. 교회에서 포옹하면 안 되고 침대에서 설교하면 안 된다. 교회 안의 포옹을 반대하는 견고한 개혁신학적 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포옹에 관한 그런 소신을 재고하게 되었다. 첫째, 나 자신이 공적인 '허거'(포옹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나의 신학과 행위를 조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좀 더 깊은 면이 있다. 몇 달 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카이퍼에 대해 강의하면서 교회가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여러 면으로 모종의 가족적 기능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이퍼의 신학은 가족 단위가 꽤 안정되어 있었던 19세기 네덜란드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가정은 문제가 많다. 역기능적이라는 단어는 가정생활에 적용되는 통상적인 수식어가 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가정 속에 존재해왔던 포용과 친근이 없다. 카이퍼의 용어를 빌면 이는 '영역 축소'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한 영역의 핵심적인 속성들이 일부 상실한 것이다. 그런 일이 발생할 때는 축소된 그 기능을 다른 영역이 보완해야 한다. 어느 교인은 자신이 한 주간 내내 포옹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 포옹할 수 있다는 게 난 기쁘다. 

- 출처 : 국민일보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