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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0代의 난… 헤비메탈, 히피, 자살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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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代의 난… 헤비메탈, 히피, 자살시도

-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배본철 교수(성결대, 교회사)는 지난 한해 필리핀, 아프리카, 영국 등 세계를 돌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스스로 이 순회를 ‘세계순회 성령사역’이라 이름붙였죠. 그는 이 순회를 통해 “신념과 주장을 좀 더 힘 있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배 교수가 가졌던 신념과 주장은 무엇일까요. “나의 거듭난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라고 고백하는 배 교수가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글에 녹여 본지에 기고했습니다. 질풍노도의 기간을 지나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을 좇아 세계를 순회했던 모든 과정을 매주 화요일 소개합니다. 배 교수와 함께 성령이 운행하는 세계로 다시 떠나봅시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배성령. 내가 신학생일 때 함께 섬기고 있던 교회의 어느 여전도사님이 내게 붙여주신 별명이었다. 좀 듣기 어색하긴 했으나 별로 싫지는 않았다. 사실 거듭난 이후 내 신앙의 한 중심에는 성령님과의 깊은 교제,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는 마음이 언제나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붙은 별명에 걸맞게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도 성령세례에 관한 것이었으니, 성령운동에 관한 연구는 내 생애에 걸쳐 지속된 관심 주제였다고 본다.

내 나이 20세가 되기 전까지 나는 주님을 몰랐다. 나의 10대의 삶 대부분을 방황과 어둠속에서 지냈다. 그때가 1970년대였으니까 요즘 이른바 7080이라는 문화의 한 어두운 면에 젖어 지냈다고 할 수 있겠다. 음악을 무척 좋아했었는데, 특히 헤비메탈(heavy metal)이라고 불리는 매우 시끄럽고도 무거운 팝송들을 좋아했다. 그때 좋아하던 팝 그룹들 가운데는 아직까지도 건재하고 있는 그룹들도 많은데, 블랙 사바츠(Black Sabbath),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딥 퍼플(Deep Purple) 등. 지금도 꽤 알려져 있는 가히 전설적인 팝 그룹들이다. 

그런가 하면 그 당시 청소년층에서는 미국의 히피(hippie) 문화에 대한 친근감이 강했던 터라, 나 역시 일부러 남루한 옷을 입고 다니기도 하고, 며칠 동안 세수를 하지 않고 다니기도 하면서, 세상을 허무주의적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데 나름대로의 멋스러움을 느꼈다.

당시엔 남자 중고등학생들은 모두 머리를 짧게 깎아야만 했던 시대라, 밤거리의 유흥을 즐기는데 있어서 짧은 머리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 거리였다. 왜냐하면 유흥업소에서 미성년자인 중고등학생을 받아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 신분임을 가리기 위해서는 긴 머리가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우리 집 옆에 가발 공장이 하나 있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재고품으로 남겨져 있는 가발 두 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엔 가발 수준이 매우 저급해서, 누가 가발을 쓰고 다니면 곧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난 가르마가 가운데로 난 긴 생머리 스타일과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스타일의 곱슬머리를 손에 넣었다. 생머리 스타일은 내가 좋아 하는 스타일이지만, 안타깝게도 날씨가 좋을 때만 쓰고 다녀야 했다. 왜냐하면 바람 불고 비오면 금방 가발이 엉키거나 속이 들여다보이곤 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곱슬머리 스타일은 날씨가 안 좋을 때 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길가는 행인들의 시선이 장발의 곱슬머리 청년에게 쏠리는 것만 빼놓고는. 아무튼 당시의 나는 성인 행세를 하고 밤거리를 돌아다니기 위해 가발이 필요했던 것이다.

10대의 나. 돌이켜 보면 그 때의 나는 극도의 허무감과 무기력 그리고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 살았다. 그리고 그 종국에는 삶의 포기만이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졌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흉기로 동맥을 끊으려 했던 적이 있었고, 다량의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농약을 마시고 절벽에서 떨어지려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하고는 제주도로 향했다. 죄악의 거리를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주로 향하는 배 갑판 위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새사람이 되어 다시 돌아올게 아니라면 차라리 거기서 죽어버리리라.” 제주도에서 관광학을 전공하면서 대학을 잠시 다녔으나, 역시 나는 밝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 같다.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나는 그때부터 공사판이며 귤 농장의 일을 다니면서 지냈다. 점점 깊어지는 어둠이 내 삶을 덮고 있었다. 1976년의 가을과 겨울을 거의 귤 농장에서 혼자 지냈다. 밤마다 엄청난 고독감과 삶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면서, 안주 없이 마시는 소주 한 병만이 그나마 나를 달래주는 유일한 동반자였다.

그 해 12월 31일. 이 날은 내가 몇 날이고 고민을 한 끝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나의 삶을 그 분께 부탁하기로 다짐을 한 날이다. 깊어가는 밤. 나는 홀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나의 볼에는 눈물이 타고 내려왔다.

다음 날인 1977년 새해 새아침은 정말 눈부시게 밝은 태양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니, 태양빛보다도 더 밝은 주님의 사랑과 평안이 내 맘 속에 가득 흘러 넘쳐들었다. 성경 말씀은 다 나를 위해 창세전부터 예비 되어진 것 같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17절)

나의 모든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전에 추구하던 모든 세상 것들이 아무 의미 없이 여겨졌다. 오직 기도하고 말씀 읽고 찬양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이 나의 새로워진 삶의 양식이 되었다. 후에 나는 당시의 변화 받은 삶을 회상하며 「21세기 예수부흥」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거듭나기 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무도 귀한 두 가지 선물을 예비하셨다. 이 선물들로 인해 나의 거듭난 이후의 영적 생활은 즉각적으로 평안과 기쁨과 만족의 심령천국을 누릴 수가 있었다. 또 이 선물들로 인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삼고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선물이란, 하나는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였고 또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한 불신감이었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은 곧장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에 대한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은 곧 신실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의 삶으로 불타오르게 해주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은혜, 이 놀라운 은혜가 내게 임할 수 있도록, 거듭나기 전에 어둠 속을 헤매던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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