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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성과 영성, 인성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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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을 뿌리친 교회개혁자 안셀무스
 
-  송태흔 목사(동인교회) 


안셀무스는 주후 1033년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지방에서 유명한 부르고뉴 가문 출신인 어머니 에르멘베르가와 롬바르디아 귀족 출신인 아버지 곤돌포 사이에서 태어난다. 안셀무스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정통 신앙을 본받아 ‘질서·책임·순종·기쁨·온유·친밀함’을 갖춘 탁월한 크리스천 인격자가 된다. 아들이 자신을 이어 위대한 정치가로 출세하기를 바랐던 아버지를 뒤로 하고, 그는 1056년 정든 부모와 고향을 떠났고 1059년 노르망디에 위치한 베크(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루앙과 리지외 사이)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된다.

그곳 수도원장 랑프랑은 문법과 변증이라는 논리학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였다. 안셀무스는 그의 가르침을 통해 체계적인 학문을 위한 중요한 방법론을 터득한다. 스승 랑프랑에게서 매우 탁월한 지적 능력과 더불어 깊은 신앙심을 전수받은 안셀무스는 1063-1078년까지 베크의 베네딕트 수도원 부원장으로, 1078년부터는 영국으로 떠난 스승을 대신해 그곳 수도원장으로 봉직한다. 그는 임기 중 매우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했으며, 저명한 신학 서적들을 다수 펴냈다. 이 때 저술된 다양한 책들은 수도승다운 도덕적 훈계와 영적 성숙, 그리고 수많은 독서를 통한 명상의 깊은 향기를 담고 있다.

주후 1079년 안셀무스는 그의 스승 랑프랑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있던 영국을 처음으로 방문한다. 랑프랑의 수제자로 시대의 탁월한 학자요, 영성있는 목회자로 이미 알려진 안셀무스는 캔터베리 대주교로 당연히 거론됐고, 마침내 1093년 12월 8일 영국 감독들 앞에서 요크 대주교 토머스의 집전에 따라 랑프랑 후임으로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다. 그때 안셀무스는 문제 많은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가 내키지 않았으나, 잉글랜드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수락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영국 왕 윌리엄 2세가 안셀무스를 불러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 대가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요구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직매매 행위(성직 임명에 대한 보답)에 해당된다고 설명하면서 뇌물처럼 돈을 건네주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윌리엄 2세는 안셀무스가 로마에 가서 우르바누스 2세로부터 팔리움(교황청의 대주교 승인을 상징하는 예복)을 수여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에 안셀무스는 교회의 성직과 관련된 문제에 세속적인 왕이 개입할 권한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며 서임 논쟁(敍任論爭)을 주도한다. 교회의 성직 임명권은 세속적 지배자가 갖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교회의 수장인 교황에게 있다는 논쟁을 주도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안셀무스는 1103년 4월부터 1106년 8월까지 대주교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임 논쟁은 웨스트민스터 교회 회의에서 타결됐고, 왕은 성직의 상징물인 반지와 지팡이를 갖고 주교와 대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단지 주교와 대수도원장이 축성에 앞서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만 결의했다. 

이 협약은 신성로마제국에서 한동안 있었던 성직을 둘러싼 논란을 해소했고, 1107년 8월 1일 웨스트민스터 제국의회에서 교황과 왕의 합의(Concordat)로 선언되면서 서임권 투쟁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권력 앞에 당당했던 안셀무스 대주교는 “나는 내가 거저 얻은 바를 그것을 바라는 이들에게 기꺼이 주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1109년 4월21일 캔터베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서유럽이 외세의 침공으로부터 벗어난 11세기 기독교는 유럽 전역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동시에 교권과 왕권의 대립, 기독교와 이교도의 마찰 등은 당시 유럽 사회를 괴롭히는 최고의 악이었다. 이때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위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게 됐다. 

스콜라 철학은 이러한 신앙적 요청을 잘 규명해 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됐다. 스콜라 학파의 목표는 철저한 논리와 이성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의 신학 체계를 새로 정립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이성적, 체계적으로 정리해 세상으로 하여금 분명한 진리의 체계 속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헌신한 사람이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다.

안셀무스는 스콜라 철학을 위한 어떤 학교나 학파도 세우지 않았다. 스콜라주의 또한 그가 주도하거나 기획하지도 않았다. 다만 전통적인 권위를 이성으로 검증하고 새롭게 결정지으려 한 스콜라주의적 태도가 안셀무스로부터 나온 것뿐이다. 깊은 묵상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발견했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하나되기를 열망했던 그는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신학적 기초와 체계를 확립시켰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교회가 신비주의적인 믿음 만능주의를 벗어나 오직 말씀의 기초 위에서 올바른 신앙관으로 다져지기를 촉구했던 것이다.

최첨단 사회 발전과 수준 높은 문화적 산물을 만들고 있는 21세기에도 한국교회 상당 부분은 무모한 신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주전 2333년 단군 조선 설립 이래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신비주의적 기복 신앙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불건전하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이방 종교와 비슷한 잘못된 기복 교리를 정통 기독교의 진리인양 설파하는 혹세무민 세력들은 사그라질 줄 모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성경과 기독교 전체를 인간이 가진 이성적인 능력으로만 모두 해석할 수도, 운용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 세우신 이 땅의 기독교가 우리 인간에게 주신 이성적인 능력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맹목적·기복적인 믿음 만능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정통 교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이단적인 산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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