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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애착에서 나오는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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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에서 나오는 상처       
 
- 전병욱 목사(삼일교회)
 

상처는 애착에서 나온다. 애착을 버리면 아픔도 없다. 남자에게 얼굴이 못생겼다고 말하면 별로 상처받지 않는다. 반면에 여자에게 얼굴이 못생겼다고 말하면 크게 상처 받는다. 왜? 여자는 얼굴이나 몸매에 남자보다 더 크게 애착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처를 받지 않는 비결은 무엇인가? 스스로 애착을 갖는 부분을 멸시해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발버둥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심각한 공격도 별로 상처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초연한 성도의 삶의 이유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사역을 하다 보면, 점점 자기를 부인하는 쪽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점점 성화되어 간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해 보면, 다르게도 설명할 수 있다. 사역의 규모가 커지다 보면, 오해하는 사람, 시기심으로 공격하는 사람 등이 많아진다. 자기 자존심, 자기 체면, 자기 교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서 크게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런 상처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하고 나중에는 피하게 된다. 

공격으로 인한 상처를 피하는 길이 무엇인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살기 위한 방편으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적의 공격조차도 나의 성숙과 나의 변화에 촉매 작용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모든 상황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그래서 나쁜 상황이라고 무조건 피할 필요는 없다. 바울은 항상 복음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헌신된 사람일 수 있는가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가 자기 의를 붙들고, 자기 주장으로 서 있었다면, 과연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는 배경이 좋지 않았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제일 나중에 사도가 된 사람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그의 사도성까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자기 부인이 없었다면, 생존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어려움과 공격조차도 거룩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 것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물어보라. 왜 글을 쓰는가? 삶이 고통스러워서 글을 쓴다. 삶이 고통스럽지 않으면, 고민할 것이 없다. 고민 없이 나오는 글은 빈껍데기이다. 고통이 주는 영감이 있다. 고통이 축복이다. 10년 전 쯤에 처음으로 특별새벽기도회를 했다. 당시 다룬 본문이 사사기이다. 

사사기 12장에는 입산, 엘론, 압돈 등 별 의미없어 보이는 사사들의 일대기가 묘사되어 있다. "입산이 사사가 되었고, 죽었다" "엘론이 사사가 되었고, 죽었다"라는 식의 단순한 묘사만이 반복된다. 설교할 때는 피하고 싶은 본문이 있다. 

그러나 연속 설교는 피할 수 없다. 옆의 종이에 계속 인사이트를 써 내려 갔다. "입산, 할 말이 없다." "엘론, 할 말이 없다." "압돈, 할 말이 없다." 도저히 그 본문으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릎을 치는 인사이트가 생겼다. 그때 했던 설교 제목이 '할 말이 없는 인생을 살지 말자'였다. 

어떤 상황도 나쁜 상황은 없다. 정직하게 부딪히면, 그 나쁜 상황 속에서도 가치 있는 열매들은 나오게 돼 있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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