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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곱하기 제로,곱하기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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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하기 제로,곱하기 예수       
 
- 조병호 한시미션 대표·목사
 

온 나라가 숫자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경제성장률, 주가지수, 환율 등 지금 대한민국은 '경제 숫자'에 매달려 있다. 숫자가 모든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이렇게 말한다. "네 배나 갚겠나이다." 역시 세리답다. 세리는 계산에 무척 능한 사람이다. 숫자를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것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바로 세리였다. 민족, 그것도 가난한 자기 민족의 주머니에서 효과적으로 '빼기'를 하고, 그렇게 '더하기'를 한 세금에 대해 로마와 '나누기'를 하는 것이 바로 세리의 삶이다.

마태는 그의 인생에 황금만능주의를 곱하고 있었다. 물질이면 다 된다는 생각에 레위 지파라는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도 미련 없이 버렸다. 유대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독히 현실적이었던 마태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세리 마태'의 길을 간다. 하지만 그의 이름 앞에 세리가 붙는 순간 마태의 인생은 '곱하기 제로(Zero)'가 됐다. 어느 인생에 황금만능주의를 곱하면 제로가 되지 않겠는가?

어느 날 예수님이 마태를 찾아오셨다. 함께 가자는 것이다. 마태는 너무 기뻐 많은 친구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보고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죄인의 자리에 있던 마태에게 우리 주님이 오셔서 '곱하기 예수'를 해주신 것이다.

이제 마태는 자신의 동족들에게 '곱하기 예수'를 해주고 싶었다. 동족들과 자신의 과거 관계를 생각해볼 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긴장되었다. 적어도 세리 출신인 마태 자신은 동족들 앞에 어떤 말도 꺼낼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처럼 황금만능주의는 아니지만 유대 선민주의라는 곱셈을 하고 있던 자신의 동족들에게 진심으로 예수를 곱해 주고 싶었다. 

마태는 유대인들이 보면 2000년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족보로 첫 장을 시작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유대 민족의 입장에서 다윗은 그 민족 전체 1000년 역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영웅 중의 영웅이다. 그런데 이어 마태는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술하며, 밧세바가 아닌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는 말 한마디를 압축해서 넣었다. 다윗의 인생 최대 실수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물론 다윗의 인생 70년에는 많은 '더하기'가 있었다. 골리앗을 이긴 것은 '더하기'였다. 성전을 짓고자 한 열망은 그의 당대는 물론 이후 역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생 최대의 '더하기'였다. 그런데 다윗이 우리야를 죽인 일은 그의 인생 전체를 '곱하기 제로'로 만든다. 1000년의 대표자 다윗도 결국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많은 인생들이 자신의 인생에 재물을 곱한다. 도덕윤리주의를 곱한다. 민족주의 이념을 곱한다. 하지만 재물 윤리 민족주의 등 이런 어떤 것들이 더하기가 아닌,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된다면 그것은 '곱하기 제로'와도 같다. 그러나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가 곱해지면 천하보다 소중해지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의 계산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모든 인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다. 우리 모든 죄인들이 예수를 곱해서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돼야 한다. 마태의 심장으로 21세기 우리 민족을 향해 '곱하기 예수'를 외쳐 본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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